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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레나이 와타루X스즈키 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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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가 몽롱하게 아파왔다. 꼭 꼿꼿하게 서서 잠든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고, 특히 다리, 다리가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머리를 흔들고 정신을 차리면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딛고 있는 모래바닥이 이질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떤 고등학교 같았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눈에 익지 않은 교복이나 풍경을 보고 있자면 그제야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나. 언젠가부터 느껴지는 감각에 등 뒤를 더듬으면 가방을 매고 있었다. 출처 모를 교복, 어딘지도 모를 학교에, 이젠 출처 모를 가방까지. 소리 없는 놀람을 얼굴로 표현하고 있으면, 뒤에서 누군가 나를 툭 쳤다. 역시 모르는 얼굴에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뒷걸음질을 치면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가만히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뱉는 것이다. 꼭 몇 달은 친분을 쌓았던 것처럼.

 “쿠레나이 군, 여기서 멍하니 뭐 해? 그러다가 지각한다?”


 말을 흘리듯 내뱉은 학생은 나를 지나쳐 갔다. 익숙한 사람인 양 쿠레나이 군이라고 부르는 어조하며, 당연하게 학생으로 받아들이는 문장 하며. 어색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멈춰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한참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얼굴을 알 턱이 없는 학생들이 나를 지나쳐가며 인사를 한다. 안녕, 쿠레나이 군. 좋은 아침, 오늘도 졸려 보인다. 어색하게 인사를 받고 학교 현관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누군가가 내 목에 어깨동무를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놀라서 소리를 낼 뻔 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시선을 겨우 그에게 돌리면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와타루 군, 여기서 뭐 해? 얼른 들어가자. 너 오늘도 지각하면 벌청소다?”


 하던 학생은, 무작정 내 등을 떠밀었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달려가면 내 반, 같은 곳에 떠밀려 들어올 수 있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야? 왜 키배트는 보이질 않는 거지? 빈자리에 앉아 책상 밑 서랍을 뒤적거리면 노트 한 권이 손에 잡혔다. 꺼내 표지를 보자 정갈한 나의 글씨체로,‘쿠레나이 와타루, 2학년 1반.’이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이런 걸 쓴 기억은 없다. 노트는 수업 시간에 요점을 적어둔 건지 수식이나 공식이 잔뜩 적혀 있었다. 노트를 덮고 옆자리를 봤다. 학생들이 전부 들어찬 것 같은데도 옆자리만은 비어 있었다. 학생이 홀수인가? 여기서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긴장한 몸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아는 척을 할 때마다 긴장에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겨우 답을 하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삼삼오오 모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제발 머리에서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쯤,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 교탁을 두드렸다. 삽시간에 잦아들은 수다 소리에 어깨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자, 조용들 하시고. 오늘은 전학생이 왔다.”


 전학생이라는 말에 학생들이 일제히 기대감에 차 웅성거렸다. 이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게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순간 빈자리에 시선이 닿았다. 여기에 와서 좋은 일이라고는 혼자 앉은 것뿐인데, 그마저도 사라질 것 같았다. 그 애가 나에게 말을 걸겠지. 무어라도 대답해야 하지? 불안이 천천히 하지만 빠르게 들어찼다. 주변 소리가 멀리서 들릴 정도로 머리가 멍했다. 선생이 전학생을 보고 들어오라고 한 건지, 교실 앞문이 열렸다. 최고조를 향해 치닫는 불안이 우스워질 정도로 머리를 강타하는 놀람에 전학생에게 시선을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번째의 놀람이었으나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한 학교에, 온통 낯선 것 투성이인 학교에서 처음으로 익숙한 것을 보았다. 스즈키 미오, 당신의 얼굴. 그 또한 불안하다는 듯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자기소개라도 하라는 말에 어깨를 심하게 떨었다. 미오 씨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가 겨우 목소리가 달싹이는 입술 새로 삐져나왔다.


 “안녕하세요, 스즈키 미오라고 합니다. 아, 이름은 이렇게 쓰고…….”


 현재 미오 씨를 향해 있을 약 60개의 눈. 미오 씨는 눈에 띄게 긴장해서 곧 빨갛게 올라올 것만 같은 상기된 얼굴로, 불안정한 목소리로,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동급생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학생들의 환호성과 박수에 미오 씨는 더 움츠러들어 보였다. 선생에게 빈자리를 안내받은 미오 씨와, 미오 씨를 계속 보고 있던 나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 미오 씨의 눈이 점점 커지는 걸 보고 있자니 약간은 웃음이 나왔다. 나도 계속 저런 표정이었겠지 싶어서. 미오 씨는 굳은 걸음으로 자리에 앉아 주변 눈치를 보다가, 선생이 자잘한 전달사항을 나눠주고 있을 때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와타루 씨는 어쩌다가…….”
 “글쎄요, 저도 잘…….”


 멋쩍은 웃음을 보내며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머쓱함에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 상황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듯한 미오 씨를 곁눈질하다가 시선을 반대편 대각선 아래로 내렸다. 아는 얼굴이 옆에 앉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라는 사람은 미오 씨에게도 말을 잘 못 건네는 사람이 아니었는가. 겨우 뱉은 말은 겨우 그거였다.


 “이런 상황에 이런 말을 하기엔 이상하지만……. 그래도 제 옆자리가 미오 씨여서 다행이에요.”


 미오 씨는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옆자리가 와타루 씨여서 다행이에요. 모르는 사람 옆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이 계속 친근감을 가지고 대하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미오 씨가, 누구도 아닌 미오 씨가 내가 옆자리여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그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답답했다. 기쁨에 잠기는 감각은 여전히 싫지 않았다. 오직 당신 곁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스즈키 미오라는 이름은 나의 기쁨이라는 짧은 구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멋대로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절대 입밖으로 내뱉지 않을, 나만의 비밀.


 학교 수업은 퍽 지루한 일의 연속이었다. 쓸 데도 없는 수업을 한참 듣고, 쉬는 시간은 10분밖에 없어 조금 쉬었다 싶으면 다음 수업을 준비해야만 했다. 3개 교시를 들으며 지루하지 않은 시간은 오직 음악 시간뿐이었다. 피아노 반주를 하고, 바이올린을 켜기만 해도 괜찮은 50분, 게다가 미오 씨가 줄곧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설명은 충분했다. 미오 씨가 나를 보고 웃고, 박수를 치고, 행복해하는 모습. 이미 그걸로 세상을 전부 취하고도 남은 것 같았다.


 찾아온 점심시간에 숨을 돌리고 가방을 더듬었다. 도시락을 기대하진 않았고 그저 빵이나 살 수 있는 지갑을 찾는 행동이었으나 잡힌 것은 지갑이 아닌 도시락이었다. 가방에 필통이나 노트가 들어있어서 살았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도시락까지 들어있을 줄은 몰랐다. 문득 무서움마저 들었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의 위치를 꿰차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 사람의 삶을 헤집고 있는 게 아닐까? 괜한 걱정이 들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인 키배트를 무의식적으로 찾았으나, 그마저도 곁에 없다. 이렇게 필요할 때인데. 늘어가는 근거와 출처 없는 고민에 한참 앓고 있으니 누군가 내 등허리를 쿡 찔렀다. 예고 없는 행동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뱉고 뒤를 돌아보니 스즈키 미오, 그가 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와타루 씨, 같이 도시락 먹지 않을래요? ……그게, 다른 사람한테 먹자고 하긴 좀 그런데. 혼자 먹자니 어색해서요.”


 쭈뼛거리는 목소리나 수줍게 피어나는 미소에 당연하다는 듯,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그 얼굴을 보고 어떻게 거절을 하겠는가. 제안을 수락하면 말갛게 웃는 얼굴을 보고도 거절 따위를 할 수가 없었다. 조용한 곳을 알아뒀다는 미오 씨가 이끄는 대로 걷다 보면 학생들의 웃음소리나 목소리가 멀어졌다. 교정 뒤편, 학교에 몇 번씩 오가는 사람도 위치를 모를 작은 잔디밭. 미오 씨는 자리를 잡고 앉아 내게 손짓했다.


 “와타루 씨, 여기 앉아요. 여기가 부드러워서 앉기 편해요.”


 미오 씨의 옆에 앉을 수가 있다니. 이게 다 꿈인 것 같았다. 달콤한 꿈에 젖어있는 것만 같아 멍하니 서 있다가, 미오 씨의 의아한 낯을 보고 서둘러 옆에 가서 앉았다. 입술을 꾹꾹 씹으며 표정을 관리하려 해도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길이 없었다. 괜히 미오 씨의 곁에 좀 더 붙어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케첩이 뿌려지지 않은 오므라이스와 문어 모양 비엔나 두 개, 방울토마토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귀여운 도시락을 자랑할 마음으로 미오 씨 쪽을 돌아보자, 볶음밥이 고양이 모양으로 꾸며져 있는 것을 보고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오 씨는 웃더니 내 옷깃을 당겨가며 말을 뱉었다.


 “이것 좀 봐요, 고양이에요. 귀엽지 않아요? 이 도시락을 원래 먹어야 할 사람은 아쉽게 됐겠어요. 와타루 씨 것도 보여주세요.”


 귀여운 도시락이죠? 하고 묻는 것 같은 눈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미오 씨 것에 비해 많이 단조로운데. 실망하시면 어쩌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일부러 미오 씨 쪽을 보지 않은 채 도시락을 그에게 들이밀자 미오 씨의 약한 탄성이 들렸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려 미오 씨 쪽을 보자 미오 씨가 눈을 빛내며 도시락을 보고 있다가, 귀엽다고 말하곤 내 얼굴을 보며 웃었다. 진심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접힌 눈꼬리가, 올라간 입꼬리가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돌렸다.


 “왜 그래요, 와타루 씨. 어디 안 좋아요?”


 금새 걱정으로 변질되는 목소리를 들으면 표정까지 상상되는 것 같았다. 고개를 천천히 내젓고 괜히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나누었다.


 “저, 점심시간 끝나겠어요. 배고프다. 얼른 먹고 들어가요, 선생님께 혼나겠어요.”


 말을 더듬은 것을 네가 영영 몰랐으면 좋겠다. 비엔나를 입에 넣으려다가 네 도시락에 올려두고 모르는 척을 했다. 한 발 늦게 깨달은 미오 씨가 웃으면서 장난치지 말라고 하셨다. 장난친 거 아닌데. 비엔나를 돌려주려는 걸 이리저리 피하며 입에 밥을 넣었다. 식은 감이 있어도 맛있었다. 내가 두 입 째를 삼킬 때까지 미오 씨는 내게 비엔나를 돌려주려고 안간힘이었다.


 “와타루 씨, 얼른 가져가요. 줄 필요 없대도요.”
 “저도 하나 있으니까 괜찮아요, 미오 씨 드세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도시락에도 있는 걸요, 비엔나.”

 그렇게 말씀하신 미오 씨는 내게 게 모양 비엔나를 보여주었다. 다시 돌려받기엔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있는데 또 드리기도 뭐하지 않나. 게다가 이 비엔나로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미오 씨는 밥을 한 술도 뜨지 못하셨고.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게 비엔나가 두 개인 것을 제대로 확인하고 게 비엔나를 가리켰다.

 “교환하는 걸로 해요. 제 문어 비엔나랑, 미오 씨의 게 비엔나랑.”
 “어. 아하하, 그럴까요?”

 미오 씨는 내 문어 비엔나 옆에 게 비엔나를 귀엽게 두었다. 미오 씨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는 듯 볶음밥을 조금씩 입에 넣기 시작했다. 때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쓰다듬고 갔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나를 반겼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멀리서 들렸다. 둘 밖에 없는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쁠 일이었나. 꼭 이 세계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교실에 있을 때보다 확연하게 긴장이 풀린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같이 긴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그거랑 별개로 말을 한 번 걸어야 한다는 생각은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모처럼 둘만 있는 건데,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밥을 한참 씹다가 문득 생각이 미쳤다. 미오 씨는 내가 악기를 연주할 때 웃으셨었다. 몸을 미오 씨 쪽으로 틀고 넌지시 말을 던졌다.


 “저기, 미오 씨. 밥 다 먹고 시간 남으면 음악실 안 갈래요?”
 “음악실에는 왜요?”


 머리 위에 물음표를 하나 띄운
 표정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웃음을 꾹 눌러 참고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바이올린 켜드릴게요. 식사 후에 잔잔한 노래 들으면 마음도 편해지고 좋잖아요.”
“아, 좋아요. 듣고 싶어요. 와타루 씨가 연주하는 걸 듣고 있으면 마음이 진정되니까, 와타루 씨 말대로 마음도 편해지고 좋을 거 같아요.”


 제안을 받아줬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네가 나의 일부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언젠가 그 모든 것을 이루는 날 좋아한다고 하는 널 볼 수 있을까. 얄팍한 기대감을 가지며 도시락을 비우고 뚜껑을 닫았다.


 점심시간을 틈타, 음악 선생의 눈을 피해 음악실로 숨어들었다. 음악실 근처를 지나던 선생의 눈을 겨우 피하고서야 책상 밑에서 기어나와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미오 씨의 모습이, 이러면 안 되지만 우스웠다. 내 꼴도 별반 다르지 않은지 한참 둘이서 웃음을 터트리다가 먼지를 털어내고, 서로의 옷에 묻은 먼지를 떼어주고 나서야 바이올린을 잡았다. 역시 견습용은 견습용, 소리가 무딜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조율을 마치고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었다. 네 표정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을 보며 집중하고 있는 너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 어깨에 바이올린이 아니라 긴장감과 부담감이라는 돌덩이를 얹은 것 같았다. 늘 연주하는 것에서 변화를 주고 싶어 다른 곡을 연주했다. 학교니까, 학교에 어울리는 잔잔하지만 밝고 가끔 밝은 부분도 있는 노래를 연주했다. 답지 않게 잔뜩 긴장해서는 활을 잘못 놀릴 뻔도 했으나 다행히 애드리브로 넘어갈 수 있었다. 단 한 명을 위한 교실 하나 크기의 작은 연주회. 피치카토로 곡을 끝내면 미오 씨가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그 웃음을 볼 수 있다면 뭔들 못할까. 미오 씨가 감상을 이야기해주기도 전에 종이 울렸다. 5분 안에 교실로 돌아오라는 예비종. 곧 음악실로 선생님이 돌아올 것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었으므로, 눈빛만을 교환하고 바이올린을 정리해 아무도 모르게 음악실에서 빠져나왔다.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긴장이 탁, 소리를 내며 나를 놓았다. 수업 종이 울리자마자 졸음이 파도처럼 다가오더니, 20분쯤 지나자 그대로 졸음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식곤증의 실재를 느끼며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눈을 비볐다. 앞에서 수업하는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10분만 졸다가 정신을 차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수마에 굴복했다.


 느릿하게 눈을 뜨고 일어나면 주변이 시끄러웠다.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 시야를 트면 눈앞에 내 쪽을 보고 누워있는 미오 씨가 들어왔다. 머리는 깨었으나 몸은 깨지 않은 탓에 몸은 잘 움직이질 않았고, 그렇게 엎드려 한참 미오 씨를 보고 있으니 미오 씨가 또 말갛게 웃었다.


 “깼어요? 많이 피곤했나봐요.”


그 말을 듣자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필시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을 것이다. 눈을 꾹, 감고 있다가 뜨며 몸을 일으키자 미오 씨가 같이 몸을 일으킨다. 졸음을 털어내 버리고 마른 얼굴을 문질러 아예 졸음을 씻어내리자, 미오 씨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계속 자길래,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일부러 안 깨웠어요. 선생님께는 안 들켰어요, 괜찮아요.”
 “그래도 깨워주지. 왠지 머쓱하잖아요, 다들 깨어있는데 나만 잠들어 있으면.”
 “에이, 와타루 씨만 자지는 않았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교과서 꺼내야지, 하는 생각이 미쳐 책상 밑 서랍을 뒤적였다. 귀가까지 두 시간이나 남았다. 갑자기 미오 씨의 웃음소리가 들려 옆을 바라보자, 미오 씨가 참지 못했다는 듯 키득키득 웃고 계셨다. 영문도 모르고 의아한 낯
을 하고 있자, 웃음을 겨우 멈춘 미오 씨가 교과서를 가리켰다.

 “다음 교시, 물리 시간이에요.”
 “네? 국어 다음에 물리잖아요……?”


 그런 의문을 뱉으며 시간표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자, 시간표보다 먼저 시계가 들어왔다. 마지막 교시 시작하기 5분 전. 멍하니 시계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같은 반 학생들이 나를 보더니 큭큭 웃으며 다시 자신의 할 일을 잡았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눈을 이리저리 옮기다 미오 씨를 돌아보자 예외는 없다는 듯 웃고 계셨다. 정말 좋아하는 미오 씨의 웃는 얼굴이지만, 이 순간엔 야속하기만 했다.


 “왜……. 왜 그렇게 웃으세요. 그래도 쉬는 시간에는 깨워주시지. 다음 교시가 국어 시간인 줄로만 알았잖아요. 부끄럽게.”


 교과서를 바꿔 꺼내며 괜히 볼멘소리를 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라 식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괜히 미오 씨 쪽을 보지 않고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자, 누군가 내 머리칼을 만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미오 씨일 것이다.


“와타루 씨, 화 난 거예요?”


 목소리엔 약간의 다정과 약간의
 걱정, 그리고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미오 씨를 미안하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고개를 저으며 들어 올려 미오 씨 쪽을 바라본다. 목소리와 낯이 똑같았다. 약간의 다정, 약간의 걱정, 그리고 미안함이 들어있는 얼굴.

 “그냥, 다들 웃으니까 부끄러워서 그랬어요. 이번엔 절대 안 잘 거예요. 혹시 자면 저 깨워주세요. 약속.”


 괜히 툴툴거리며 네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부끄러움을 숨기고 싶어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이래봤자 다 티가 날 텐데. 미오 씨 앞에서는 꼭 모든 감정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다. 입술을 꾹꾹 씹으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한참 아무런 감각도 없던 손가락에 타인의 손가락이 감겨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한 자락.


 “약속. 이번엔 꼭 깨울게요. 그러니까 화 풀어줄래요, 와타루 씨?”


 못 이기겠다는 듯 조금씩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뚱한 얼굴인 나와 다르게 여전히 웃는 얼굴인 당신. 괜히 부끄러워진다. 때마침 울리는 종과 교실로 들어서는 선생님이 얼마나 반갑던지. 얼른 교과서를 펼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겉으로 보기엔 퍽 우등생같은 모습이었으나, 선생님의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 한 구석을 채우던 생각이 천천히 커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오 씨는 내가 미오 씨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을까?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찔했다.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좋아하는 걸 티내지도 않았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으니 절대로 모를 거라 간주하며 수업에 집중하려 했다. 아무리 칠판을 집중해도 지워지지 않는 잡념 때문에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집중하려 눈을 부릅뜨고 칠판에 적히는 글씨를 봤기 때문에, 졸음은 쏟아지지 않았다.


 겨우 학교가 끝나고 청소 시간이 찾아왔다. 책상 밑을 쓸다가 맞닿은 빗자루로 장난을 치기도 몇 번. 종례를 마치고 따라오라는 목소리에 미오 씨를 돌아보다가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돌아간다면 미오 씨와 함께 하교하고 싶었는데.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어서 입술만 몰래 이죽인 채 뒤를 따라가자, 내게 열쇠 하나를 건넸다.


 “나중에 또 자전거로 사고치지 마라, 쿠레나이. 압수 기간 안 끝났는데 돌려주는 거야. 내일 보자.”


 자전거의 ‘원래’ 주인이 아무래도 자전거로 사고를 친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자전거를 받아, 이걸 내가 끌고 가도 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방을 바구니에 넣고 올라탔다.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는 길을 질주하다가 미오 씨를 발견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는 게 나랑 똑같아서, 자전거 경적을 울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오 씨!”


 이쪽을 돌아보며 놀라는 당신에게 손짓했다. 미오 씨는 웃으며 가방을 바구니에 넣었다.


 “어디로 갈 거예요?”
 “음, 일단 어디로든 갈 거예요.”


 박차를 가하듯 발을 움직인 뒤 페달을 밟았다. 달라진 무게에 조금 뻑뻑하게 느껴지던 페달도 어느 새 가벼워졌다. 왜인지 모르지만 한적한 길을 따라 자전거를 돌리다가 작은 매점을 발견해 아이스크림을 나눠 샀다. 운전대를 잡아야 하니 당연히 내 것은 펜슬형 아이스크림, 미오 씨는 취향대로 막대형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며 도심을 한 바퀴 돌아도 갈 수 있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페달을 강하게 밟아 속도를 올리면 시원한 바람이 앞머리를 화악 넘겼다. 소다맛 아이스크림을 쭉 빨아들이며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고 있다가,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들어갔다. 적당한 포장이 되어 있지만 이따금 덜컹거리게 만드는 작은 길.


 “와타루 씨, 이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약간 돌렸다가 앞을 보면 미오 씨가 뇌까리듯 말을 이었다.


 “이렇게 계속 학생이 된 것처럼 등교하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원래 학교를 다니던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그 자리를 꿰찬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요.”


 미오 씨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천천히 브레이크를 잡고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며, 정리된 생각을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하고 우스운 생각이지만, 한 번 주절거려서 나쁠 것도 있겠는가.


 “저도 사실 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저나 미오 씨가 등교할 때, 원래 등교를 했어야 하는 학생들은 저나 미오 씨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자리도 메워지고, 우리가 그 사람들 자리도 메운 거죠.”


 미오 씨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언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점심 먹고 바이올린 켜면서요. 마음이 진정되니까 생각이 빠르게 움직이더라고요.”


 다시 페달을 밟으며 길을 달렸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뒤로 넘겨준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간질이고, 소다맛 아이스크림을 목으로 넘기는 감각에 화함을 더한다는 착각을 준다.


 “와타루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기분이 나아졌어요. 사실 내내 걱정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미오 씨는 내 등에 옆얼굴을 기대며 웃었다. 웃음에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이대로 시간이 멎었으면 좋겠다. 한참 미오 씨의 웃음의 온도를 곱씹을 수 있도록. 멀리 익숙한 건물의 일부가 보여 고개를 약간 빼고 바라보면, 아무리 봐도 집처럼 보였다. 미오 씨 쪽을 곁눈질하면 그도 발견한 건지 고개를 빼고 보고 있었다. 씩 웃으며 페달을 콱 밟았다.


 “확인하러 갈까요, 미오 씨? 누가 저 대신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는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다시 제대로 앉으면 미오 씨가 내 등에 기댄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문장을 내뱉지 않고도 꼭 세상에 둘만 남을 수 있었음을 일찍 깨달아 볼 걸.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가면, 미오 씨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섞여 날아갔다. 한참을 이렇게 있을 수 있기를. 교복 자락이 익숙해질 무렵, 그런 꿈을 꾸고 마는 것이다. 다시 원래 삶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렇게 있을 수 있기를. 일 년이고, 이 년이고, 그렇게 몇 년이고 당신과 함께 웃을 수 있기를.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마저 당신에겐 비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늘어간다. 언젠가는 말할 거지만, 지금 당장은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보물처럼 간직하자고 생각하며 페달을 밟는다. 미오 씨의 온기가 등에 은은하게 닿아오는 게 느껴진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기를.


가면라이더 포제
사쿠타 류세이X노자마 토모코
조기퇴장

❖ 〈가면라이더×가면라이더 위자드&포제 MOVIE 대전 얼티메이텀〉의 설정과 다른 설정을 사용한 글이나, 〈가면라이더 포제〉 본편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 〈가면라이더 포제〉 본편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Pale Blue

 세이텐(靑点) 고등학교의 운동장 구석 그늘, 달리기 실습을 마친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논쟁을 벌였다. 체육 담당 교사이자 2학년 2반의 담임인 사쿠타 류세이의 눈을 피하려고 급수대 옆 구석에 모인 학생들은 각자 진지하게 의견을 내놨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쿠타 선생님이 명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어도, 그걸로 사서 선생님께 어필하는 건 무리라니까.”
“그건 그렇지. 누가 대놓고 ‘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예요.’하고 어필하겠어. 내가 보기엔 그거보다 류세이 선생님이 미모로 어필해야 한다고 생각해. 남자는 역시 얼굴, 아니겠어?”
“오, 그렇지. 그런데 만약에 사서 쌤 취향이 류세이 쌤이 아니라면?”
“아니. 취향이 문제겠어? 그 얼굴은 취향이 어떻든 다들 좋아할 얼굴이라고.”
“저, 이제야 이런 질문하는 거 좀 미안한데, 사쿠타 선생님이랑 노자마 선생님이랑 어떤 사이인데 너희들이 이어주려고 하는 거야?”


2학년 2반의 마당발 나기와 연예인 지망생 마유미, 그리고 유도부 부장 신야는 고개를 돌려 속닥이는 전교 1등인 미카를 바라봤다. 나기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잘 들어, 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들은 소문인데 말이지. 사쿠타 선생님이랑 사서 선생님이 사실 같은 학교에 다녔대.”
“같은 학교?”
“응. 정확히 말하자면 사서 선생님이 다니던 학교에 사쿠타 선생님이 교환편입을 반년 정도 간 적 있대. 국어 선생님께 들었어.”


나기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자, 마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번 소문은 좀 신빙성이 있네. 다른 것도 아니고 국어 선생님의 정보라면 말이야.”
“그럼……. 그때 알게 됐다가 여기서 다시 만났단 말이야?”
미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는 신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나는 하나 더 들은 게 있는데, 둘이 같은 동아리 출신이래.”
“그거 완전히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잖아? 내가 보기엔, 그때부터 둘이 뭔가 있었던 게 분명해.”
“있어? 뭐가 있는데?”
“그것도 몰라? 분명히 둘이 썸 타는…….”


익숙한 목소리에 신야와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과 똑같이 쭈그려 앉은 채로 팔짱을 낀 교사, 류세이가 있었다. 아이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거나 놀라서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나기였다.


“서, 선생님. 애들 달리기하는 거 보고 계셨던 거 아니었어요?”
“어. 그랬지. 잠깐 물 마시려고 온 건데 너희가 내 얘기 하는 거 같아서.”


그 말에 아이들은 천천히 일어섰다. 류세이는 모른 척 돌아서려는 아이들의 어깨를 세게 붙들었다. 아이들은 녹슨 로봇처럼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돌려 류세이를 바라봤다.


“어딜 도망치려고.”
“저, 저 반에 두고 온 게 있어서요!”
“저도요! 제가 그, 머리 묶는 끈을 두고 와서!”
“마유미 너 지금 머리 묶고 있잖아.”
“어, 그, 그렇죠.”
“사, 사실 마유미는 제가 머리 묶을 걸 빌려주려고 한 거예요!”
“마, 맞아! 제가 묶을 게 아니고 미카가 묶을 거예요!”
“그럼 내가 가져올 테니까 너희 넷, 체육관 청소 좀 하고 있어. 꼼꼼하게 잘 닦아야 한다. 도망치면 알지?”


류세이가 싸늘하게 말하자 네 명은 인생을 포기한 것 같은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류세이는 머리끈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교실로 향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 가장 관심 있는 게 연애와 남들 이야기와 남들 연애 이야기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남들 연애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기가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아이들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요즘 애들 말로─류세이도 따지자면 요즘 애들에 속했지만─‘썸’이라는 것을 세이텐 고교 사서 교사인 ‘노자마 토모코’와 타고 있었고, 반년 정도 같은 학교에 다녔던 것마저도 사실이었다.


애들에게까지 소문이 날 정도라면 토모코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류세이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나 토모코가 만약 류세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학창시절 늘 류세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토모코였으니 말이다. 어른이 되었으니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토모코의 태도 역시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뜨뜻미지근하게 굴 리가 없었다. 2학년 교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간 류세이는 계단에서 모퉁이로 돌자마자 누군가와 부딪쳤다. 류세이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넘어지려는 상대를 붙잡았다. 그게 누군지 류세이는 잠시 뒤에야 알게 됐다.


“토, 토모코 쨩?”
“아야……. 사쿠타 선생님,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말하려던 류세이는 사쿠타 선생님이란 호칭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정면으로 부딪친 건지 코를 문지르는 모양새가 걱정되기는 했으나, 류세이는 쌓여만 가는 불만에 걱정한다는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토모코는 코를 문지르는 손을 내리더니 고개를 들어 류세이를 바라봤다. 류세이는 토모코를 잡은 손을 놓고 한발 물러섰다.


“사쿠타 선생님? 어디 안 좋으세요? 표정이.”
“……글쎄요. 선생님이 한 번 맞혀 보시죠.”


류세이는 순간 아차 했으나 내뱉은 말을 도로 삼킬 수는 없었다. 토모코는 어물거리면서 뭔지는 몰라도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류세이는 입술을 다시 씹었다. 아는데 모른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류세이는 대강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토모코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길 기대했으나 토모코는 류세이를 부르지 않았다. 류세이가 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토모코는 없었다.


서로를 허물없이 대할 수 있던 때와 지금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류세이는 교실 문을 열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복도는 한산했다. 바닥에 어둡게 비치는 신발과 신발을 신은 자신의 모습이 류세이는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한참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서른여 개의 걸상이 교탁에 선 류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머리끈 찾아야지.’


힘이 빠진 류세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마유미의 자리에서 머리끈을 찾기 시작했다. 몇 분을 휘적거리듯 마유미의 책상 위와 서랍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머리끈은커녕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류세이는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교실 중간에 서서 허공을 올려다 봤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허공에 부스러지듯 흩어졌다.


 ✦


 겐타로가 교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듯 부원들에게 말했을 때, 류세이 역시 교사의 길을 택했다. 부원들은 친구 따라가는 거냐며 류세이를 놀려댔지만, 류세이에게도 내세울 만한─거창하게 내세우기까지 하겠냐만.─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아마노가와와 스바루보시를 오가면서, 류세이는 학생이면서 가면라이더 메테오로 학교를 지켜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류세이는 학교라는 장소를, 학생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정한 장래가 교사였다. 인터폴에서 온 스카우트 제안도 그래서 거절했다. 사람들을 지킨다는 목적은 같았으나, 경찰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류세이의 말을 듣고 토모코가 입을 열었다.


“……음. 그런가요.”
“응. 토모코 쨩, 네 생각은 어때?”


초코케이크를 깨작거리던 토모코가 고개를 들었을 때, 류세이는 담임 선생님이 자기 시험지를 채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학생처럼 초조해졌다. 토모코는 그런 걸 자신한테 물어봐도 소용없다는 듯 침묵했다. 손에 밴 땀을 바지에 닦아낸 류세이가 설득하듯 말했다.


“너라면 괜찮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거 같아서. 토모코 네가 보기엔 어때? 내가 잉가의 제안을 거절한 거, 잘한 일일까?”
그 말에 토모코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하지만 류세이 선배. 저는 그런 것까지는 대답해드릴 수 없어요.”
“그래?”
“……제 영감은 시험지를 채점하는 게 아니고 채점되지 않은 시험지의 점수를 예측하는 거에 가까워요.”


류세이는 뜨끔한 얼굴로 토모코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다소 탄 맛이 나는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마셔도 맛을 모를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토모코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평소에 말씀하셨잖아요? ‘네 운명은 내가 정한다’고. 류세이 선배는 자신의 운명까지 정하겠다고도 하셨죠? 그럼 정한 걸 후회하지 않게 밀고 가시면 돼요.”
“……응.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노력해볼게. 고마워. 늘 너한테는 도움만 받네.”
“뭘요. 저야말로 류세이 선배한테 도움만 받았는걸요.”


토모코가 옅게 웃으며 류세이의 꿈을 응원하겠다고 했을 때, 류세이 역시 토모코의 꿈을 응원하겠다고 했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장래희망을 알고 있었다. 3학년이었던 겐타로, 켄고, 유우키 그리고 류세이가 졸업하기 전에 토모코가 언젠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던 걸 류세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독서와 글 쓰는 걸 좋아하는 토모코에게 잘 어울린다고 류세이는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을 다니면서 살던 곳을 옮기게 된 류세이는 이따금 메일을 주고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토모코와 연락이 뜸해졌다. 글 쓰는 건 잘 되냐고 묻는 건 무례한 질문 같아서 류세이는 대신 잘 지내냐는 뻔한 질문이나 시간이 되면 다 같이 모이자는 의례적인 말만 반복하게 되었고, 그마저도 학년이 올라가자 줄이게 되었다.


류세이가 자신이 토모코를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좋아한다고 자각한 것은 연락이 줄어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정확히 몇 월 며칠인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틈만 나면 토모코에게 먼저 메일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먼저 보내게 되는 빈도수가 늘게 되었다는 건 기억했다. 그만큼 이렇게 자주 보내도 되는 건지, 어떻게 보내야 덜 뻔하고 토모코가 덜 불쾌해할지 고민하는 시간도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류세이는 이날만큼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2015년 6월 17일 오후 4시 39분이었다.─토모코에게 짤막한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류세이 선배. 저, 등단하게 됐어요.]


방학인 데다 마침 약속도 없어서 침대에 누워있던 류세이는 메일을 받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메일을 보내려 했을 때 토모코가 어떤 감정으로 문장을 써 내려갔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떨려왔다. 축하한다는 말은 부족했다. 류세이는 급하게 장문의 메시지를 작성하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자꾸만 혀 밑으로 단어가 툭툭 걸려 버석거리는 느낌이었다. 마음은 벌써 토모코에게 쑥스러운 축하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서 전하고 싶었지만, 토모코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는 사람은 류세이 한 명만이 아닐 터였다.


네가 꿈을 이루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고, 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 역시도 노력 중이라고. 그렇게 시작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최대한 눌러 담은 메일을 보내려던 류세이는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메일을 끝맺은 ‘다음 주에 만나자’는 문장이 너무도 가벼워 보였다. 그 문장을 시작으로 모든 문장이 눈에 걸리기 시작했다. 류세이는 어떻게든 메일을 고쳐 보려다가 결국 축하한다는 싱거운 내용만 남겨두고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한심해.”


류세이는 중얼거렸다. 메테오 드라이버와 스위치는 여전히 집에 있었고 가면라이더부 친구들과도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메테오가 되어 싸웠던 일은 아무래도 거짓말인 것 같았다. 그 가운데 가장 믿기지 않는 감정은 토모코에게 향하는 애정이었다. 애정은 비눗방울처럼 투명하고 햇빛과 만나면 오색찬란하게 반짝여서 손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았다.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아니 토모코가 다가왔을 때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다른 사이가 되었을까? 류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꼭 사귀지 않아도, 소중한 사이로 남을 수 있었다. 토모코의 마음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토모코가 동경하는 건 메테오인 류세이였다. 지금도 메테오로 변신할 수 있는 건 변함이 없었지만, 그때처럼 학교를 지키는 전사로서 싸울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엇보다 류세이는 토모코를 부담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축하해줘서 고맙다는 답장에 류세이는 나중에 부원들과 시간을 내서 만나자고 답했다. 류세이의 생각과 달리 부원들이 모일 계기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류세이는 토모코와 재회하게 되었다.


바로 류세이가 교생으로 부임하게 된 세이텐 고등학교에서였다.


 ✦


 “저, 선생님?”


턱을 괴고 있던 류세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종례를 끝내고 진로상담을 하던 중에 잡념에 빠진 모양이었다. 류세이는 미카에게 사과하고는 하던 말을 이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미카는 류세이를 응시하기만 하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류세이는 미카가 침묵하는 그 잠시간, 심사숙고하는 듯한 미카의 태도나 표정이 토모코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노자마 선생님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티 많이 나?”
“네. 아까 종례할 때도 기운 없어 보이셨어요. 반장이랑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닌가 하고.”
류세이는 입을 닫았다. 학생들에게까지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건 교사로서 썩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미카는 눈을 내리까는 류세이를 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두 분,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응? 어?”
“아니……. 노자마 선생님도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셔서 여쭤본 거예요. 아니라면 죄송해요.”


미카는 토모코가 있는 도서관을 관리하는 도서문예부의─도서부와 문예부의 인원이 적어 합쳐졌다.─부장이기도 했다. 당연히 토모코와 친했고, 토모코 또한 미카를 아끼는 듯했다. 빌릴 책이 있다는 핑계로 도서관에 자주 들러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류세이는 다른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토모코의 상태가 정확히 어땠냐고 물었다. 미카는 토모코의 상태가 어땠나 떠올리려는지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음……. 표정은 평소랑 그렇게 다르지 않았는데, 애들 없으면 멍하니 아래만 보고 계셨어요.”


류세이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토모코는 고등학생일 때도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았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구석은 있었지만, 언제나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했고 그와 반대로 생각이 표정에 잘 드러나는 편은 아니었다. 눈치가 좋은 류세이조차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야 토모코의 표정에서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류세이는 토모코가 속이 깊은 만큼 상처받기 쉽고, 그것을 오래 담아두지 않지만 피하지도 않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계단 앞에서 부딪쳤을 때 퉁명스럽게 군 것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류세이는 마른세수를 하고는 미카에게 세이텐 고등학교에 부임하고 나서부터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세이텐 고등학교에 오자마자 류세이는 주임 교사의 안내를 받아 학교 내 여러 시설과 주의해야 할 점을 배웠다. 체육 교사인 류세이는 특히 체육관의 설비와 비품을 관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주임의 말을 수첩에 적어두고 밑줄까지 쳤다. 동료 교사들과도 인사를 마친 류세이는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안내받았다. 다른 시설은 진작에 소개받았으면서 도서관이 마지막이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류세이가 들를 일이 적다고 여긴 주임의 판단─류세이와 토모코가 지인이란 것을 알게 된 주임이 당황한 듯 먼저 털어놓아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교실과 교무실, 체육관을 제외하고 도서관을 가장 많이 들르게 되었지만, 어쨌든 류세이는 만약 자신이 도서관을 먼저 갔더라면 그 뒤의 내용은 새까맣게 잊어먹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의 사서 교사이자, 도서문예부의 담당 고문 교사가 토모코였기 때문이었다.


류세이와 토모코는 서로를 보자마자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고, 주임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무슨 일이냐고 묻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알고 보니 토모코는 소설가를 준비하면서 사서 교사 자격도 얻기 위해 공부 중이었고, 류세이보다 먼저 세이텐 고등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


“등단했으니까, 사서는 안 해도 되지 않아?”


류세이가 그렇게 묻자, 토모코는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는 아직 작가 인세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답변을 내놨다.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라 류세이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침묵 속에 여러 감정을 눌러 담았다. 이런 상황이 운명이 아니라면, 뭘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소 주책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류세이는 앞으로 관계가 진척될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고등학생일 때보다 뒤로 물러나면 물러났지 가까워지지 않았다. 류세이의 말을 조용하게 경청하던 미카가 물었다.


“정말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요?”
“오자마자 회식을 하긴 했는데…….”


류세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동료 교사들이 젊고 새로운 교생이 온 것에 들떠서 회식을 가자고 했을 때, 류세이는 다른 사람보다 토모코의 반응을 신경 썼다. 토모코는 늘 그렇듯 구석에서 손을 가만히 모은 채로 교사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각자 참여 의사를 밝히는 가운데, 회식 자리의 주인공인 류세이에게로 화살이 돌아왔고 류세이는 토모코의 눈치를 보면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토모코에게 회식에 참여할 것인지 물었다. 토모코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후인 것 같아. 토모코 쨩 반응이 이상해진 게.”
“……저기요, 선생님. 제가 두 분이 고등학생 때 어떤 사이셨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들어보니까 노자마 선생님이 왜 그러시는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한데요.”
“정말로? 뭔데?”
미카는 떠름한 기색을 보이며 웃더니 류세이에게 말했다.
“설마 거기서 지금처럼 노자마 선생님을 ‘토모코 쨩’이라고 부르신 건 아니죠……?”
“그, 그건…….”


류세이는 말을 흐렸다. 처음엔 자기도 모르게 그런 호칭이 튀어나왔는데, 그래도 토모코의 반응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 후에는 자제하려고 했다. 회식 때도 일부러 떨어져서 앉았고 데려다주는 것도 토모코와 친하다는 동료 교사에게 부탁해서 무사히 돌려보냈다. 그런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류세이는 눈을 열심히 굴리면서 생각해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뭐, 두 분만 있는 데서 그런 건 상관이 없는데 그게 좀 난처하셨던 게 아닐까요?”
“그건 인정해. 남들한테 안 좋은 의미로 주목받는 걸 워낙 싫어하는 애니까. 그 이유도 아예 없으리라고는 생각 안 해.”
미카는 계속해서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 류세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표정을 굳혔다.
“예의 없는 거 알지만, 말해도 되나요?”
“돼.”
“참 망하는 것도 여러 가지로 하시네요.”


류세이는 울컥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2반 학생들이 왜 이렇게 자기 연애도 아닌 담임의 연애를 축구 경기 즐기듯 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심지어는 연애에 전혀 관심이 없는 반장과 미카조차도 이렇게 나서는 판이니, 교사로서 체면이 전혀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신경 쓸 단계가 아니었다. 미카는 답답한지 넥타이를 풀면서 조목조목 읊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노자마 선생님은 사쿠타 선생님의 ‘그런 태도’에 상처받으신 거예요.”
“‘그런 태도’?”
“네. ……회식 때 노자마 선생님이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떨어져 앉으셨다면서요.”
“응.”
“데려다주지 않으셨고요.”
“……설마.”


류세이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했다. 토모코가 부담스러워할까 한 배려에 토모코는 오히려 류세이가 자신을 부담스럽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류세이는 손으로 얼굴을 싸맸다. 토모코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토모코를 배려해서 한 행동이었다. 토모코가 혹여나 곤란해질 것 같아서.


“나, 난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그때 일 가지고 이야기는 해보셨어요?”
“아니. 안 했어. ……토모코 쨩 성격에 분명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


류세이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학생 진로상담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도리에 어긋난다는 생각은 어느새 저만치 밀어두었다. 가만히 손으로 깍지를 끼고 턱을 받치던 류세이는 잠시 뒤, 미카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미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노자마 선생님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널 부담스러워하는 게 아니고, 우리 둘 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다 보니까 조심하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미카는 정 안 풀릴 거 같으면 자신과 다른 학생들이─운동장에서 류세이의 짝사랑을 논하던 멤버, 나기와 마유미, 그리고 신야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류세이는 생각했다.─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류세이는 미카가 연애를 해본 적이 있기나 한지 궁금했지만, 우선 제자의 호의에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 뒤에야 진로상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류세이는 당황해서 다음 날 시간을 한 번 더 잡자고 했지만, 미카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 사실 아빠 회사 물려받을 거라 진로상담 안 받아도 돼요.”
“……그렇, 응?!”
“아, 물론 바로 물려받는 건 아니고 성인 되면 아빠 회사 계열사에서 차근차근 일 배워갈 예정이에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니 그럼 진로상담은 왜 신청한 건데!’


류세이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허, 하고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카는 태연하게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미카가 고개를 숙이며 교실 문을 닫자, 류세이는 망연하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학생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미카가 써놓은 장래희망이 ‘기업가’였던가. 류세이는 마른세수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진행한 진로상담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잡생각을 떨쳐버리려 자료를 한 번 더 훑어보던 류세이는 똑같이 진로를 고민하던 고등학생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 아마노가와에 교환편입을 갔을 때 류세이는 아직 2학년이었다. 류세이는 따로 마련해놓은 자리에 정리한 자료를 올려놓다가 책상 한편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 세이텐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대여해주는 책이었다. 뒤표지와 책등에 붙여진 스티커에는 학교의 로고와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다. 학교의 로고는 푸른 점이 모여서 한 송이의 꽃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었다.


스티커에서 바코드와 도서 분류 코드가 있는 부분을 쓰다듬다가 류세이는 책을 집어 들었다. 다 읽지 않았고 대여 기간도 오늘로 끝이었지만, 대여 기간을 일주일 정도 연장할 수는 있었다. 그 핑계로 도서관에 찾아갈 수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 류세이는 아직 도서관에 토모코가 있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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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보면, 조디아츠가 나타나지 않을 때 토모코는 종종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숙제인가 싶어서 류세이가 슬쩍 보려고 하면, 토모코는 항상 책을 끌어안으며 자신이 뭘 보고 있는지 숨기곤 했다. 토모코가 소설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류세이가 가면라이더 메테오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토모코가 류세이에게 마음을 열고 난 후부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류세이는 토모코가 소설이 아닌 우주 사진집을 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류세이는 코팅이 되어 반질거리는 종이를 보고는 호기심에 다가갔다. 토모코는 인기척에 바로 류세이를 돌아봤다. 류세이는 자신의 행동을 토모코가 신경 쓰는 것 같아 무안해졌고, 머쓱한 투로 물었다.


“무슨 책인지 물어봐도 될까?”
“아, 이거……. 유우키 선배가 추천해주셨어요. 인공위성에서 찍은 우주의 모습이나 지구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이라고.”
“음, 그렇구나.”


류세이의 눈이 저절로 한 사진으로 향했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푸른 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 토모코의 시선은 류세이가 바라보고 있는 페이지로 향했다. 토모코는 류세이에게 사진집을 같이 보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래도 괜찮겠냐고 한 번 물은 류세이는 토모코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연스레 토모코의 옆에 앉았다. 류세이는 자신의 눈이 향하던 페이지를 향해 다시 눈길을 주었다. 토모코는 사진을 설명하는 부분을 가리키며 천천히 말했다.


“이 사진, 보이저 1호가 1990년에 해왕성을 돌다가 촬영한 거래요. 이 푸른 점이 지구예요. 정말 작죠?”


토모코가 고개를 돌려 류세이를 보면서 물었다. 류세이는 토모코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어서 읽어주지 않아도 책에 적힌 내용을 알 수 있는데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토모코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토모코는 말을 이었다.


“아, 맞다. 이 사진 찍으라고 제안한 사람이 책 쓴 게 있다는데요…….”


류세이는 토모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류세이의 입에서 책의 제목이 나왔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이래. 아까 토모코 쨩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 그 사람이 남겼다는 감상 찾았는데, 읽어줄까?”


토모코의 눈동자가 한 번 흔들렸다. 류세이와 눈을 마주친 것이 쑥스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류세이가 무언가를 읽어준다는 것이 낯설었던 것인지 입술을 오물거리며 괜히 자신의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류세이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면서 토모코의 반응을 살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토모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류세이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한 번 큼, 하고 소리를 내더니 핸드폰에 적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저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이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글이 말하는 바는 방대하고 장대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찰나와 역사가 이곳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고통마저도 사진에서는 작게 표시된다고. 이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는 다만 푸르고 창백한 점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글을 다 읽었을 때 류세이는 왠지 모르게 뭉클해졌다. 허무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편해졌다. 지구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한 사람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작고 적다고 해도,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작은 발버둥이라도 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는 일들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함마저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 글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 또한 그것이었으리라.


무언가 묻은 것만 같아 눈가를 훔치던 류세이는 토모코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토모코의 감상을 물었다. 류세이는 자기 목소리가 다소 잠겨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글쎄요. ……좋은 글 같아요. 그러고 보면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알게 되는 건 얼마나 행운일까요.”
“그러게. 스쳐 지나가는 것도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일 텐데 친구가 된다는 건 말이야. 그런 걸 운명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렇네요. 운명이라. 들을 때마다 멋진 단어 같아요. 뭐랄까, ‘운’에서 시작해서 ‘명’으로 끝나는 발음이요?”


류세이는 한 번 운명, 하고 중얼거려보았다. 늘 내뱉는 단어인데도 토모코가 말하니 낯설게만 느껴졌다. ‘명’에서 맞물리는 입술의 감촉이 생경했다. 류세이는 쑥스러워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류세이는 말했다. 토모코는 그 말에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침묵했다. 어색한 침묵 뒤에 토모코가 낱장을 넘겨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류세이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그래도 된다고 했다. 토모코는 어렴풋하게 웃으며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토모코가 낱장을 넘긴 순간, 종이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토모코의 살을 파고들었다.
 



 류세이는 도서관 문 앞에서 멈칫했다. 유리문으로 되어있는 도서관 문의 문고리에 손을 얹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유리문 안으로 책장과 학생들이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구역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토모코가 있나 보려고 해도 사서가 있는 자리는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류세이는 한숨을 쉬다가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기합을 넣었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자, 인기척에 놀란 건지 토모코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음, 저 도서 대출 기간 연장하러 왔는데요.”
“아……. 네, 자, 잠시만요.”


류세이가 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 부산스럽게 구는 토모코를 보며 류세이는 눈을 내리떴다. 토모코는 류세이가 내민 책을 제대로 받아들지도 않았다. 아닌 것 같으면서 은근히 연기 못한다니까. 류세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자, 토모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토모코의 입에서 띄엄띄엄 단어가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제가 다른 생각을 하던 중이라서.”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다 읽지는 못했지만, 책 재밌더라고요.”


대출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와 장부를 번갈아 보던 토모코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토모코는 마저 기간 연장 작업을 마치고 류세이에게 책을 내밀었다. 토모코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맴돌았다.


“재밌으셨다니 다행이에요. 그러고 보니 사쿠타 선생님은 여기서 책을 자주 빌리시네요. 다른 선생님들은 시립 도서관에서 빌리시거나 아니면 다들 사시던데.”


류세이는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다문 건 토모코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이 이야기가 한 번쯤은 나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오리라고 예상하진 못했다. 류세이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차분히 입을 뗐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왠지 편해져서요. 물론 학생들 틈에 껴서 책을 빌리는 게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여기 오는 걸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포기라고 하니까 웃기긴 하네요. ……그래도 진심이에요. 도서관에 오는 거 좋아한다는 거랑 노자마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책, 재밌다는 거도요.”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라는 미카의 조언대로, 류세이는 거짓이나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말했다. 엄지손톱으로 손바닥을 세게 누르니 아려왔다. 그러나 손바닥이 아픈 것도 모르고 류세이는 토모코를 용기 내 바라봤다. 도서관 창으로 들어오는 노을에 토모코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떨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역시 역효과였던 걸까?


“……감사해요.”


시야에 꼼지락거리는 토모코의 손가락이 보였다. 류세이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토모코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긴장되거나 떨리면 토모코가 종종 하는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류세이는 얼른 토모코가 무안하지 않게 퇴장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
“자, 잠시만요!”


다급한 외침에 류세이가 뒤돌자, 토모코가 급히 자리에서 나와 류세이의 소매 끝자락을 잡았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행동인지 토모코는 금방 류세이의 소매를 잡은 손을 힘없이 놓아버렸다. 토모코의 손가락이 허무하게 허공을 방황하며 움직였다. 류세이는 그 움직임이 이를테면 여름에 떨어지는 낙엽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느낀 것일 텐데도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러니까,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계절을 빗나간 감각 같은 것 말이다. 류세이는 이전에도 그런 감각을 토모코에게서 느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정확히 언제 일어난 일이고 자신이 그걸 어떻게 느꼈는지는 쉬이 떠올리지 못했다.


“저, 오래는 안 걸리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서고랑 장부에 적힌 정보가 맞는지 확인만 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이따가 같이 퇴근해도 될까 해서요.”


토모코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가듯 작아졌다. 손에 힘을 줘가면서까지 말하더니 용기를 짜내기라도 한 듯 말을 마치자마자 토모코는 곧 손끝에 준 힘을 풀었다. 류세이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


토모코의 눈이 다시 토끼 눈처럼 커졌다. 류세이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놓아버렸다는 걸 알고 얼른 자리에 앉아 기다릴 테니 천천히 정리하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적당한 구석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시각이면 유독 햇빛이 눈 부셔서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일부러 창가에서 떨어진 곳을 찾았건만, 도서관이 있는 건물이 해가 지는 때면 볕이 많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런 시간에 도서관에 오는 건 처음인 거 같네, 그러고 보니까.’


류세이는 책장과 책장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노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학창시절, 류세이는 무술에 열중했지만, 공부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다닐 땐 매 학기 전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받았고, 교환·편입 프로그램에 선발되기도 했다. 어른이 된 지금, 회상해보면 그건 무엇 하나 놓치기 싫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류세이는 생각했다. 그래서 숙제에 필요한 책이 있으면 이따금 도서관에 들르고는 했다. 점심시간이나 학교가 끝나자마자 찾아간 것이 전부였다. 류세이 역시 다른 학생들처럼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갔지, 책을 읽기 위해 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주황빛 노을은 유독 날카로운 빛을 내고 있었다. 류세이는 바닥과 건너편 책상에 일자로 드리운 노을빛이, 자신이 읽고 있는 책 또한 물들이는 것을 보다가 책장을 넘겼다.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이 사람을 얼마나 상처받게 했는가. 나중에야 깨닫는 일이 있다.’”


시 구절을 읽은 뒤, 류세이의 입에서 얕은 숨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책장 사이를 오가던 토모코의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류세이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멍하니 자신을 내려다보는 토모코의 얼굴을 마주했다. 토모코는 입을 뻐끔거리더니 정리가 모두 끝났다고 했다. 류세이는 책을 덮고 들고 온 가방에 집어넣었다.

‌‌“류세이 선배가 아까 읽으신 시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에요.”

토모코가 속삭이듯 이야기했으나 류세이의 귀에는 그 말이 열차가 내는 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열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차단기가 올라가자 토모코는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류세이는 그 뒤를 따라가면서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토모코가 말문을 다시 열었다.

“류세이 선배한테 추천해드린 책은 추천해드리기 전에 이미 전부 읽어봤어요. 수십 번이나요. 그래서 다 기억하고 있어요. 특히 시집은.”

토모코는 그렇게 말하면서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류세이는 놀란 얼굴로 토모코를 바라봤다. 그렇게나 수고로운 일을 할 이유가 토모코에게는 없었다. 아니 없다기보다 없을 것이라고 류세이는 생각했다. 토모코는 제 입으로 말하고도 무안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추천해드렸는데 재미가 없으면 죄송하잖아요. 류세이 선배가 저 때문에 억지로 읽으면 민망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명색이 사서잖아요. 소설가기도 하고.”

류세이는 바로 아니라고 했다. 취향이 아닌 책은 있어도 재미없는 글은 없었다. 오히려 취향이 아닌 책마저 토모코의 취향에 맞는 책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류세이는 거짓말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말을 더듬었다.

“나, 나는 그, 뭐랄까. 예전부터 네가 읽어주거나 재밌다고 한 책은 다…… 재밌게 읽었어…….”
“정말이요?”

토모코의 걸음이 멈췄다. 정말이냐고 묻는 토모코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류세이는 토모코보다 몇 발자국 앞에서 멈춰 서서는 토모코를 돌아봤다. 류세이는 웃으면서 정말이라고 했다. 류세이의 그림자가 토모코를 가리켰다. 토모코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로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류세이를 빤히 바라보더니, 들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류세이에게 내밀었다. 두꺼운 책이었다. 검은 바탕에 보름달이 그려진 표지의 책이었다. 류세이는 책을 내려다보며 토모코가 제목 밑에 있는 작가가 쓰인 부분을 책을 잡느라 가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작게 미소지었다.

“저, 괜찮다면 이것도 읽어보실래요? 빌리셔도 되고, 아니면 아예 가지셔도 괜찮은데…….”

토모코는 말을 흐렸다. 류세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토모코가 조금 충격받은 듯이 눈을 크게 뜨자, 류세이는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 이 책, 못 받을 거 같아.”
“……죄. 죄송해요. 저는 그냥…… 류세이 선배가 이 책도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응? 좋아하는데?”

류세이가 눈을 깜빡이자, 토모코도 따라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토모코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후에야 급히 류세이가 덧붙였다.

“저, 내가 거절하는 건 토모코 쨩이 책 주는 게 부담스러워서가 아니고…… 책이 이미 있어서, 그래서 그런 거야. 아, 아직 다 못 읽어서 다 읽은 다음에 감상 알려주려고 했는데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 재밌게 잘 읽고 있어.”
“제, 제 책인 거 알고 계셨어요? 아니, 그 전에 제가 알려드리지도 않았는데 책 나온 거 어떻게 아셨어요?”

토모코가 류세이의 그림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류세이는 놀라 한 발자국 물러났지만, 토모코는 류세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인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류세이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류세이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입을 틀어막으려다가 대신 눈을 슬쩍 돌렸다.

“……전에 등단했다고 했잖아. 그 후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토모코 쨩 책이 언제 나오나 하고. 그래서 매주, 서점 가서 부탁도 했고. ‘노자마 토모코’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가 쓴 책이 나오면 꼭 알려달라고.”
“……아.”

토모코는 고개를 푹 떨구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류세이는 혹시 그 사실을 토모코에게 말하지 않아서 토모코가 섭섭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도 이미 토모코가 서운해할 만한 일은 수도 없이 했기에, 류세이는 어느 일부터 사과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생각하기 시작하니 끝도 없어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류세이는 일단 미안하다고 운을 띄우기로 했고, 류세이가 입술을 달싹거리려던 찰나 토모코가 얼굴에서 손을 떼고는 먼저 말했다.

“류세이 선배가 그렇게까지 절 생각해주실 줄은 정말로 몰랐어요. ……감사해요.”
“고맙긴. 나는…….”

류세이는 눈을 끔벅이다가 이내 입을 굳게 닫았다. 지금이 맞을까? 지금 고백해도 되는 걸까? 류세이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질문과 말할 수 없는 답이 남아있었다. 여전히 담아둔 미안함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토모코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깊어져만 갔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껏 사라지지 않고 잔류하고 있었다. 류세이는 말을 잇는 대신 풀리지 않은 것들부터 풀기로 했다. 밀린 숙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처럼, 류세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토모코 쨩, 전에 너한테 매몰차게 굴었던 거 미안해. 회식 자리에서 무시한 거랑 그냥 보낸 것도. 내가 잘못한 건데 네가 날 싫어하는 줄 알고 옹졸하게 굴었어. ……정말로 미안해.”

류세이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과하자, 토모코는 어쩔 줄 몰라 손으로 입을 가리다가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저, 저도 오해해서 죄송해요. 류세이 선배가 절 부담스러워하시는 줄 알고 계속 거리를 두려고 했어요. 등단하고 류세이 선배한테 메일 보냈을 때도…….”

토모코는 말끝을 흐렸다. 류세이는 고개를 들고 토모코를 바라보자, 토모코가 똑같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토모코가 등단했다는 메일을 보냈을 때 단답형으로 답했던 것이 떠올랐다. 류세이는 식겁했다. 줄곧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토모코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이건 또 어떻게 해명을 해야 하나. 류세이는 머리가 다시 아팠다.

“미, 미안. 그건 내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서…….”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는 괜찮으니까요.”

감정의 동요라고는 좀체 느껴지지 않은 평온한 어투로 토모코가 말했다. 류세이는 들고 있던 퍼즐을 내려놓듯 담아두던 불안감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류세이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때 일은 이제 상관없다는 토모코의 말에서 류세이는 미묘한 체념을 느꼈다.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에 류세이는 짓눌릴 것만 같았다.

그제야 류세이는 언제 자신이 토모코에게서 다른 계절을 느꼈는지 알게 되었다. 류세이가 교환·편입 생활을 마치고 모교인 스바루보시로 돌아갈 적, 토모코가 마중을 나왔을 때였다. 또 스바루보시로 놀러 오라는 말에 토모코는 여자친구가 있지 않냐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류세이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말했고, 토모코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여름 끝자락에서 이상하게도 봄 내음을 느낀 것이.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해 다 지겠어요.”
“응. ……그러자.”

웃으며 돌아서는 토모코의 등을 바라보며 류세이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모코는 류세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어두워지기 시작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류세이는 입김과도 같은 바람에도 토모코가 날아 가버릴 것만 같은 마음에 초조하게 토모코를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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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던 토모코는 짙은 그림자가 책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류세이는 토모코에게 음료수 캔을 내밀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이 이상해서 토모코는 고개를 갸웃했다. 류세이는 토모코와 눈을 마주친 후에야 입을 가린 손을 허벅지 옆에 딱 붙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날씨 덥대서, 요. 이거 드시라고 가져왔는데……. 캔커피, 괜찮으세요?”

토모코는 빤히 류세이를 올려다보았다. 류세이가 무의식적으로 토모코 쨩이라고 부른 것에 난색을 보인 이후로, 류세이는 학교에서는 토모코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해왔을 뿐만 아니라 토모코를 이름이 아니라 성으로 불렀다. 의식하고 계신 걸까. 토모코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의식하고 있는 건 토모코도 피차일반이었다. 토모코가 캔을 받자 류세이는 눈에 띄게 환하게 웃었다.

“저……. 옆에 잠깐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고맙다고 말하며 캔커피를 마시려던 그때, 나무 뒤에서 슬쩍 머리를 내미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들은 토모코를 보자마자 놀라서 숨어버렸다. 토모코도 잘 알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바로 류세이가 담임으로 있는 2학년 2반 학생들이었다. 류세이 역시 아이들을 본 것인지 적잖이 당황해서는 ‘애들 농구 연습시키는 와중에 잠시 시간이 나서 왔다’고 했다. 2반 아이들은 점심시간이나 자습시간에 운동장이나 체육관에 불려 나가 류세이에게 일명 ‘수련 지도’를 받은 덕에 다들 건강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처음에는 공부 대신 운동이 말이 되냐며 반대하던 학부모들도 류세이의 인상─이라기보다 미모─, 그리고 체력이 좋아지면 공부도 잘하게 된다는 설득─이라기보다 미모와 학력─에 전부 넘어갔다. 실제로 류세이의 말대로 2반 아이들은 성적이 눈에 띄게 올랐다.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와 지금 어떤 관계인지 이야기가 나도는 모양이었다. 그다지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토모코 본인의 귀에도 들어갈 정도라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두고 쑥덕거리는 건 아무렴 상관없었지만, 류세이가 얽히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렇다고 류세이와 얽히는 것이 싫은 건 또 아니었으나 류세이가 난처해지는 건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전처럼 데면데면해지고 싶지 않아.’

오해도 겨우 풀었다. 좋아하는 감정만 조금 죽이고 드러내지만 않으면, 라이더부에서 활동하던 시절처럼 잘 지낼 수 있다. 그렇게 한 번 더 마음을 다잡던 토모코는 류세이가 손을 잡자 고개를 돌렸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토모코는 놀란 마음에 손을 빼려고 했지만 류세이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낮게 말한 탓에 그러지 못했다. 류세이의 시선은 토모코의 엄지에서 멈췄다. 토모코는 류세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고, 전날 엄지에 붙인 반창고를 발견했다.

“토모코 쨩. 이거, 어쩌다 생긴 거야?”

류세이가 작게 물었다. 가까이에 사람이 없어서인지 류세이는 평소처럼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토모코는 왠지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 책 넘기다가 베였어요.”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지만, 류세이의 얼굴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굳어버린 류세이의 얼굴을 보고 토모코는 그만 풀이 죽어버렸다.

“옛날에도 이러시더니.”
“……응?”

류세이가 퍼뜩 고개를 들고 멀뚱히 토모코를 바라봤다. 토모코는 눈길을 피하려다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왜, 전에 제가 유우키 선배한테 추천받아서 빌린 사진집…… 있잖아요. 잘못하다 손을 베서 류세이 선배가 많이 놀라셨잖아요. 그때 생각이 나서요.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괜찮아요.”

앞으로도 괜찮을 거고요. 토모코는 그 문장을 혀 밑에 눌러두었다. 그때도 이랬다. 본인이 조디아츠와 싸워서 생긴 상처도 다 아물지 않았으면서, 토모코가 고작 종이에 살짝 베인 걸 가지고 무안할 정도로 동요했다. 토모코는 치사하다고 생각하다가 눈을 세게 감았다. 또 옛날 생각을 해버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일부러 류세이를 ‘사쿠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까지 거리를 두려고 한 건데. 물론, 여전히 가면라이더부에서의 추억은 토모코에게 가장 찬란하고 소중한 보물이었으나, 그 추억에 매여서 지금의 류세이를 대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던 토모코는 누군가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건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누구인지 토모코는 알고 있었다. 류세이가 아직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으니 이마를 장난스럽게 칠 사람은 류세이 말고는 없었다. 류세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토모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코 쨩, 또 ‘류세이 선배가 부담스럽지 않게 행동해야지.’…… 그런 생각 했지?”
“그런 생각, 안 했어요.”
“그런 거 치고 나만 보면 괜찮다는 말만 계속했잖아. 지금까지.”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한 것이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할 이유도, 또 괜찮은데 괜찮지 않다고 말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혹시 내가 부담스럽게 했어? 토모코가 입을 열기도 전에 류세이가 물었다. 토모코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대쪽같이 곧기만 하던 사람이 이쪽을 보고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달콤한 눈빛을 할 때면 흔들리기야 흔들렸다. 이렇게나 멋진 사람이 그런 얼굴로 대하면 그 누구라도 흔들릴 거라고 토모코는 생각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것과는 별개로, 토모코는 류세이의 그런 호의를 다른 감정으로 혼동하고 싶지 않았다. 후배이자 친구이고, 동료인 사람에게 주는 애정이자 친절, 딱 그 정도였다. 그 외의 것을 바라는 건 토모코였지 류세이는 아닐 터였다. 예전에는 마음을 숨길 줄 몰라서 마냥 좋아 들이대기만 했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잔망스러운 행동이 통하는 건 어른이 되기 전, 그때까지였다. 어른이 되고, 토모코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자주 선을 넘어왔다는 것을. 토모코는 류세이가 준 캔커피를 조금 입에 머금다가 삼켰다. 차갑던 캔은 체온에 의해 미지근해지고 있었고, 설탕이 가득 들어갔을 커피의 뒷맛에선 조금 쓴맛이 났다. 토모코는 류세이를 볼 때마다 제 마음을 점점 알 수가 없어졌다.

“……아니면 내가 걱정하는 게 싫어?”

류세이는 순수한 의문을 담은 얼굴로 물었다. 토모코는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돌렸다. 걱정하는 게 싫냐니. 다른 사람이,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이 걱정해줄 때면 고맙고 미안했다. 좋고 싫음을 논할 일이 아니었다. 토모코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그렇구나. 나는 토모코 쨩이 걱정해주면 좋았는데.”

중얼거리듯 흘리는 말에 토모코는 류세이를 올려다 봤다. 할 말이 있지만 애써 숨기는 듯한 그 표정을, 토모코는 이전에도 본 거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류세이는 씁쓸하게 웃다가 일어섰다.

“제가 걱정해주는 게 좋다는 게 무슨…… 무슨 뜻이에요?”
“응? 말한 그대로인데. ……아, 혹시 괜찮으시면 저번처럼 같이…… 퇴근하실래요?”

뒷짐을 지며 몸을 풀던 류세이가 돌아보며 물었다. 토모코는 대답하는 대신 애꿎은 커피 캔만 세게 쥐고서 침묵했다. 류세이는 토모코에게서 눈을 떼지 않다가, 토모코의 침묵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중앙계단 앞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토모코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류세이는 나무 뒤에 숨은 아이들을 데리고─류세이에게 들킬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들 입을 벌리고 있었다.─갔다. 토모코는 결국 한숨을 쉬며 캔을 내려다 봤다. 캔에는 두 남녀가 서로 달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부드럽고 달콤한, 이란 문구가 있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아무것도 아닌 문구가 마음을 간질였다. 자기도 모르게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며 토모코는 저주할 거라는 말만 반복했다.

 ✦

 토모코가 종이에 베인 것은 류세이 탓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류세이 생각에 부주의하게 행동한 탓이었다. 책을 읽던 토모코는 문득 류세이의 말을 다시금 곱씹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생각을 떨쳐보려고 해도 류세이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지기만 했다. 장을 넘길 때마다 노을에 물든 미소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목소리가, 네가 추천해준 책은 전부 재미있게 읽었다고 수줍게 말하던 모습이, 네 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후로도 류세이가 던졌던 의미심장한 말은 끊이지 않는 문장처럼 이어졌다.

토모코는 류세이가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속이려고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를 사랑한다고 은연중에 고백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페이지를 넘기다가 토모코는 화들짝 놀라 책을 놓아버렸다.

“……아.”

엄지에 붉은 선이 생겼다. 다행히도 피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엄지 한가운데 보기 싫은 상처가 길게 생겼다. 토모코는 휴지를 찾아 상처 부위를 꾹 눌렀다. 옅은 선홍색의 피가 휴지에 희미하게 맺혔다. 다행히 연고를 바르거나 지혈을 해야 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물이 들어가면 무척이나 아플 터였다. 덧나면 큰일이기도 했기에 토모코는 반창고를 찾아 붙였다.

반창고를 붙이다 말고 토모코는 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류세이를 생각할 때마다 생기는 흉통의 정도 역시 딱 그 수준이었다. 줄곧 신경 쓸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잘못하면 덧날 수도 있고 눈물이라도 흘리면 통증은 심해질 것이다. 참, 큰일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토모코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반창고를 붙인 이후로는 조금 아프긴 해도 마음 쓰지 않고 잘 지냈는데, 점심시간에 류세이가 손을 잡고 한참을 걱정해주고 나서는 오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진짜 저주해버릴 거야. 토모코는 속으로 생각했다. 실은 고마움이 더 컸지만, 토모코는 괜히 투정을 부렸다. 안 그래도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 이후로 내심 옛날 생각이 났는데, 그때처럼 류세이는 호들갑 아닌 호들갑을 떨면서 걱정을 해주었다. 그러니 침착해지려야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도서문예부장인 미카가 토모코에게 이달 들어온 책 중에서 괜찮은 책이 있는지 물어온 덕에 겨우 류세이 생각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끝이니까.’

토모코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책이 인기를 얻고 토모코는 사서 교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교장 역시 토모코의 책이 급속도로 인기를 얻게 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신문사 인터뷰도 학교에서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교사를 그만두는 것도 내심 아쉬워하기는 했으나 이해했다며, 후임을 구하겠다고 말해줬다. 그만두게 되면, 온전히 소설을 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류세이 때문에 가슴앓이를 할 일도 물론 줄어들 것이다. 토모코를 잘 따르던 아이들이 알게 되면 서운해하겠지만, 토모코는 어쩐지 시원한 마음이 들었다.

“미카 쨩, 집에 안 가니?”
“곧 방학이잖아요. 그 전에 책 잔뜩 읽어두려고요. ……맞다. 제가 안 가면 선생님이 퇴근 못하시죠. 죄송해요. 그 생각을 못 했어요.”
“괜찮아. 나는 미카 쨩이나 부원들이 책 읽는 거 보면 기쁘거든.”

토모코와 헤어지게 되는 것이 아쉬운지 도서문예부의 부원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도서관이나 부실에 모여 책을 읽거나,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을 가지고 담소를 나누었다. 토모코의 책이 나온 직후에 열심히 읽고 감상문을 빼곡하게 적어서 주기도 했다. 부원들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드리게 돼서 죄송하다며 수줍게 말했지만, 토모코는 선물을 받은 것처럼 행복했다. 미카는 토모코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노자마 선생님 덕분에 책 읽는 게 더 재밌어졌거든요, 저.”
“……고마워, 미카 쨩.”
“뭘요. 아, 선생님. 그러고 보니 사쿠타 선생님, 1층에 서 계시던데 아직 퇴근 안 하신 모양이더라고요? 누구 기다리시는 모양이던데, 혹시 선생님 기다리시는 거예요?”

아, 맞다. 토모코는 벌떡 일어났다. 토모코가 갑자기 일어나자 미카도 따라 얼른 일어섰다. 토모코는 미카를 보고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더듬더듬 말했다. 그런 반응을 예상한 모양인지, 읽고 있는 책은 빌려가겠다고 말하며 먼저 도서관에서 나갔다. 기다리겠다더니. 토모코는 혼잣말했다. 끝쪽 계단을 이용하면 마주치지 않을 터였지만, 토모코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고야 마는 류세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녁이 다 되도록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토모코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해야 할 일을 마쳤다. 도서관의 문이 잘 잠긴 것을 확인하고 나서 계단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심장박동은 층을 내려갈수록 더 커졌다. 그리고 1층에 내려왔을 때, 토모코는 귓속을 시끄럽게 하는 매미 소리와 심장박동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류, 류세이 선배.”

그 순간, 심장도 매미도 소리를 죽였다. 토모코는 입을 벙긋거리며 류세이에게 다가갔다. 조금 지친 표정을 하면서도 류세이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왜 저 사람은 나한테 이렇게나 잘해주는 걸까. 그러면서도 가끔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건 또 왜일까. 토모코는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질문을 안고서 류세이 앞에 섰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답을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았고, 오늘 듣지 않는다면 영원히 의문을 풀지 못할 것 같았다.

“응. 왔구나.”
“오래… 기다리셨어요?”

류세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다린 지 얼마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류세이는 벽에 기댄 채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고, 무릎에 손을 대고 있었다. 거짓말. 토모코는 작게 중얼거렸다. 토모코가 중얼거린 것을 들었는지 류세이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주제를 돌렸다.

“나 때문에 할 일 다 못 마치고 나온 건 아니지? 아까 미카랑 만났거든. 너 곧 나올 거라고 했는…… 왜 그래, 토모코 쨩? 어디 안 좋아?”
“괜찮아요. 우리 얼른 가요.”

토모코가 류세이의 소매를 잡았다가 놓았다. 류세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를 숨기지 못했고, 토모코는 그런 류세이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울렁거리던 가슴이 이번엔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

 “책, 재밌게 읽었어.”

건널목을 건너고 주택 단지로 들어서는 횡단보도 앞에서 류세이가 불현듯 말을 꺼냈다. 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류세이가 뜬금없이 책 이야기를 꺼내자 토모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토모코 쨩이 쓴 책 말이야. 토모코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류세이가 덧붙였다. 토모코는 짧게 아, 하고 내뱉었다. 아직 날이 밝아 여기서 얼굴이라도 빨개지면 금방 티가 날 것이다. 토모코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다시금 어색해졌다.

“음, 역시 재밌더라고. 단숨에 읽었어.”
“……재밌, 었어요?”
“응. 이제까지 읽은 책 중에 제일.”
“류세이 선배, 판타지 소설 좋아하셨어요? 진작 추천해드릴걸.”
“아니… 사실 판타지 소설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야. 이제까지 왜 안 읽었나 싶을 정도로 재밌었어. 그래도 처음 읽은 게 토모코 쨩 책이라 다행이야.”

류세이는 웃으며 토모코를 돌아봤다. 마침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뀐 것이 행운이었다. 토모코는 대답하려다 신호등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 수 있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길을 건너고 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길에서 둘은 헤어져야 했다. 왼쪽으로 가면 토모코의 집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골목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가면 류세이의 집으로 가는 거리가 나왔다. 토모코가 안도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옅은 한숨을 내쉬는데, 류세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데려다줄게.”
“괘, 괜찮아요. 저번에도 그렇고 계속 데려다 주셨고 또.”
“……이번 한 번만 내 부탁 들어주면 안 될까?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류세이는 입술을 앙다물면서 슬픈 눈을 했다. 토모코는 머뭇거리다가 그러자고 했다. 류세이는 화색을 띠었지만, 눈에는 여전히 애수가 가득 차 있었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마음이 불편했다. 류세이의 눈이 이쪽으로 향하지 않으면 서운했으나, 막상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견딜 수 없어졌다. 류세이와 토모코는 조용히 왼쪽에 난 골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가 긴 탓에 아직 노을이 지지 않았지만, 하늘은 조금씩 어둑해졌고 시각에 맞춰서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지평선 끄트머리가 빨갛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토모코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내뱉었다.

“오늘은 별이 보일까요?”
“그러게. 구름도 없어서 잘 보일 것 같은데. 보였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다시금 침묵했다. 토모코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려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토모코와 보폭을 맞춰 걷던 류세이가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들었어. 토모코 쨩, 학교 그만둔다고.”

류세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류세이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눌러담은 듯 의기소침한 태도를 보였다. 토모코는 걸음을 따라서 멈추고 뒤돌았다. 가로등 아래에 선 류세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듯 보였다.

“…소설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애들이랑 금방 헤어지는 건 좀 아쉽지만, 일하면서 소설을 쓰는 건 저한테 좀 무리일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구나. ……그럼 이별인 건가?”
“이별은 아니에요. 저희, 동네 이웃이잖아요. 친구고요.”
“토모코 쨩, 나는.”

또다. 토모코는 중얼거렸다. 류세이는 어떻게 말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가를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힘없이 떨궜다. 토모코는 그동안 쌓아온 감정이 덧없이 흐트러지는 걸 바라봤다. 그래. 이제까지 인내하기만 했다. 류세이가 싫다고 하든, 좋다고 하든 좋으니 이 모호한 관계에 적당한 이름을 붙여주기를 바랐다. 토모코는 자신이 그랬듯, 류세이 역시 허물없이 그렇게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깔끔하게 사랑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류세이 선배. 제가 그동안 너무 불편하게 해드렸나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면 류세이 선배가 절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쓸 이유가 없잖아요.”

류세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 있는 류세이는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토모코에게는 류세이가 그보다 더 멀게만 느껴졌다.

“필요 이상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그렇잖아요. 류세이 선배가 이렇게 하시는 거, 남들 눈에는 그렇게 좋게 보이지 않을 거예요. 분명히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이렇게’는 뭐고 ‘그렇게’는 또 뭐야.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건.”
“나랑 너를 연인 사이로 보는, 그런 오해를 이야기하는 거야?”

토모코의 가슴을 바늘처럼 찌르던 류세이의 말은 이윽고 화살이 되었다. 토모코가 에둘러 하려던, 혹은 피하던 말은 결국 류세이의 입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저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전 류세이 선배한테 친구 이외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잖아요.”

류세이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토모코는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면서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아니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토모코는 알 수 없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토모코는 손을 내리고 류세이를 바라봤다.

“나한테 네가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잖아.”

류세이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소리는 토모코의 귀에 명확하게 박혔다. 토모코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발끝이 찌릿했다.

“지금도 널 보면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어지럽고 가슴이 아픈데, 이래도 나한테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류세이 선배.”

저 멀리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풍경 또한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달이 슬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똑같은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한 순간은 존재해도, 과거와 같은 현재란 있을 수 없다. 토모코는 시간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또 그 사실을 아는 모두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류세이도 그 사실을 알고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나아가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견뎌왔어. 내가 다가가면 네가 더 멀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 순간을 찾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미안해. 더는 기다릴 자신이 없어.”

류세이는 한 발 한 발 토모코에게 다가왔다. 토모코는 가로등 밑에서부터 그림자가 진 곳으로 다가오는 류세이를 올려다 봤다. 류세이의 발걸음은 사뿐거리며 다가오는 고양이 같았고, 흔들리는 아지랑이 같았다. 두 걸음 정도 앞에서 류세이는 멈췄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토모코 쨩, 날 어떻게 생각해?”
“…….”
“나는 있지. 널 사랑해. 내가 마주한 수많은 운명 중에서 널 만난 운명을 제일 사랑해. ……너는 어때? 알고 싶어. 너도 나를…… 사랑해?”

류세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류세이의 물기 서린 눈동자를 보고 토모코는 고개를 떨궜다. 은밀하게 속삭이던 사랑의 정황들, 무시할 수 없던 암시들. 토모코는 어쩌면 자신이 류세이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었다. 토모코는 류세이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토모코는 다만 그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기를 바랐다. 그보다 확고한 증거는 필요 없었고, 또 없을 터였다.

“너무…… 늦잖아요.”
“미안해. 고백하는 게 늦어서.”
“저한테 류세이 선배는…… 처음부터 너무 큰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다가가지 못할 바에야 제가 선배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편했어요.”

그러지 않으면 힘들어질 것만 같아서. 결심은 류세이와 세이텐 고등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격의 없는 친절과 애정을 구분할 자신이 토모코에게는 없었다. 토모코는 점점 선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어놓은 선은 지우개로 지워졌고 이윽고 종이 위에는 점만이 남았다. 류세이를 닮아 푸른 점이었다. 토모코는 그 점을 다시 선으로 만들어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고,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었다.

류세이는 토모코를 가만히 바라봤다. 너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오랜 침묵 끝에 토모코가 입을 열었다.

“류세이 선배는 정말로 치사한 사람이에요.”

그런 치사한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되는 게 운명이라는 걸까. 진짜 치사해요. 토모코는 중얼거렸다. 답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건 치사하다는 말을 듣고도 미소짓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로 온점을 찍어주는 것, 그 점을 단순한 점이 아닌 두 사람 간의 선으로 이어주는 것이었다.


Paper Cut.


가면라이더 가이무
카즈라바 코우타+쿠레시마 미츠자네
슭곰

< 당신과 이어진 세계 >
─쿠레시마 미츠자네x카즈라바 코우타

 이것은 아직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미숙한 신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친구들과 떠들며 교문을 지나쳐 들어가는 가쿠란과 세일러복의 무리 사이에서 어리둥절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무심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살펴보면, 설마 했던 대로 검은 가쿠란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 학교 교복은 흰색이었을 텐데.

“여어- 밋치!”

익숙한 목소리가 부르는 익숙한 애칭.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더더욱 여기에 있어선 안 될 목소리가, 방금 들렸다. 돌아본 뒤에선 믿을 수 없게도 그가 한 손을 크게 흔들며 뛰어오고 있다.

“코우타… 형?”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당신을. 그런 심정도 알지 못하고 다가온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아침 햇살같이 웃었다.

“좋은 아침! 뭐 해, 안 들어가고. 멍때리다간 지각한다?”

그리고선 손을 내려 내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교문을 지나쳐 들어간다. 그 이어지는 행동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나는 무심코 그렇구나, 생각하고 만다.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뭐가 중요해. 당신이 여기 있는걸. 언제나 나를 이끌어주었던 코우타 형의 손길을 따라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나는 교문 옆에 붙어있을 학교의 명판을 확인하지 못했다.

 처음 들어가 보는 교실이었지만 낯설다는 감각은 없었다. 왜일까. 아니,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생각과는 달리 몸은 익숙하게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교실 내에 있는 클래스 메이트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처음 보는 얼굴인가? 잘 모르겠다. 아는 얼굴이 보인 것도 같고. 어차피 나는 원래 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던 이들의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때 내게 중요한 사람들은 따로 있었고, 그러니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번의 나는 자리에 앉아 습관대로 수업 준비를 마친 채 가만히 턱을 괴고, 아직 자유 시간이 허락된 교실에서 즐겁게 떠들며 노는 클래스 메이트의 얼굴을 괜히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 사이에는 리카와 래트도 있었다. 그것이 괜히 반가워 웃음이 나왔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수업은 순조로웠다. 나는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쿠레시마다. 어릴 적부터 배워온 영재 교육 탓에 갑자기 던져진 현실에서도 수업 내용은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알고보니 옆자리였던 리카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쪽지 하나를 톡 던졌다.

‘있잖아, 지금 설명하는 문제 답이 뭐야?’

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동글동글한 글씨체 아래에 문제 풀이를 써내려갔다.

 수업은 이르게 끝났다. 아- 내일이 너희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축제구나. 일찍 끝내줄테니 마무리까지 힘내라. 그런 말을 남긴 선생님은 학생들의 환호를 받으며 교실을 나갔다.

“그럼 밋치, 갈까!”
“어… 어딜?”
“어디긴, 동아리실이지.”

여기서의 나는 동아리까지 들었구나. 그런 얼빠진 생각을 하며 리카와 래트가 손짓하는대로 털레털레 따라갔다. 계단을 몇층 내려가 운동장을 지나쳐 강당을 향한다. 무대가 있는 넓은 강당에 이미 몇몇 사람이 와있다. 설마 동아리실이 강당이야? 스케일 크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강당 한켠에 있는 코너를 도니 문이 하나 나왔다.
비트 라이더즈.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감각있게 꾸며진 로고가 문에 떡하니 붙어있다. 리카와 래트는 익숙한 듯 그 문을 열고 들어간다. 따라 들어가면 교실 정도 되는 크기의 방 안에 이미 몇몇 사람이 와 있다. 이번에는 하나같이 다 익숙한 얼굴들 뿐이라 괜히 긴장이 풀렸다. 잭, 페코, 죠노우치, 하세, 그리고. ……코우타 형.

“밋치! 왔구나, 어서와!”

코우타 형이 활짝 미소를 그리며 반긴다. 그것이 눈물이 날 정도로 사랑스러워, 흐려진 눈을 가리고자 잠깐 고개를 숙였다.

“자아- 축제가 내일이야. 마저 연습하러 가야지.”

분위기를 환기하듯 박수를 한번 짝. 코우타 형은 그렇게 모두를 이끌고 문 밖을 나가 강당의 무대로 우르르 향했다. 물론 감정을 금방 수습한 나도 그 무리에 껴있었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스테이지에 나서본 게 얼마나 오랜만이지. 그래도 오랜 시간동안 해왔다고 한동안 쉬었던 몸은 리듬과 스텝을 잊지 않고 있었다. 래트가 음악을 틀고 후다닥 제 자리에 뛰어올라오는 것을 시작으로 일제히 몸을 움직인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박자에 맞춰 착착 맞아떨어지는 안무가 기쁘다. 모두가 즐거운 얼굴로 춤을 추는 속에서 코우타 형만이 내게 눈을 마주치고, 손이 닿고, 피부가 닿고, 몸을 빙글 돌리며 합을 맞추고…… 마치 이상한 나라에 똑 떨어진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나쁘진 않았다. 이대로 이상한 나라에 의식이 잠겨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겠지.
 음악이 끝난 순간, 모든 것도 같이 끝났다. 함께 춤추던 이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고 남은 것은 단 한 명. 아직도 손을 붙잡고 있는 카즈라바 코우타. 그 뿐이다.

“안 가면 안될까요?”

나는 먼저 선수를 친다. 그는 내가 이렇게 매달리면 한없이 약해진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알고있다. 결국 나를 이기는건 당신이라는 것도.

“밋치가 깨어나지 못하는건 싫어.”

나는 빠져나가려는 코우타 형의 손을 좀 더 꼭 쥔다.

“미안해, 밋치. 내가…… 참지 못하고 널 휘말리게 했어. 모두 내 탓이야.”

강당의 무대에 덩그러니 선 두 사람. 아래를 향한 시선을 다시 들었을 때, 코우타 형의 한 쪽 눈은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 빛이 다시금 현실을 깨닫게 한다. 그래, 안다. 알고 있었다. 이건 꿈이다. 이게 현실이라면 모두가 같은 학교에 있을 리가 없다. 언제까지고 꿈에 붙들려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형도 나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막을 내려야 할 시간이다.

“축제까지 즐길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어요. 그러면 형에게 데이트를 신청했을 텐데.”
“……밋치. 화내지 않아?”
“왜요? 이렇게라도 당신을 만나서 난 기쁜데. 코우타 형은 기쁘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화를 낼까. 이 한 여름밤의 꿈은 내게 선물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해주지 않았는가.

“참지 말아 주세요. 내가 그리워하는 만큼 당신도 날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해주세요.”
“…….”

코우타 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당신을 붙잡고 있는 내 손에 이끌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게 여전히 귀여웠다.

“이런 데이트도 나쁘진 않지만요. 코우타 형. 나는 영원히 당신을 그리워할 테니까.”

부디 참지 말아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허물어진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내 어깨에 기대었던 코우타 형의 체온이 사라지는 것만이 아쉬웠다.

 *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천장은 아직도 희미한 달빛에 물들어 있다. 아직 밤이구나. 짧은 꿈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고, 당신 또한 나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라 다시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짧은 꿈으로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어져 있음을 확인했으니,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


가면라이더 아마존즈 시즌 1
마모루
주전자

꽃봉오리 피어나는 아기 두더지의 학교생활!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조용하다 못해 삼엄하기까지 한 분위기 속에서 마모루는 하품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이어리를 꾸미고 있는 친구, 턱을 괴고 마모루를 쳐다보고 있는 친구, 엎드려 잠을 자는 친구. 공부하는 친구들은 찾기 어려웠다. 원래 학교라는 게 이런 곳인가? 마모루는 생각했다. 미사키나 다른 구제반 일원들에게 들은 바와는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이 상황들이 당황스러웠다. 낯선 곳에 혼자 떨어졌다는 두려움, 경계하는 사람들의 시선, 자신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소리. 여러 요소들이 마모루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나름대로 무리 안에서 잘 적응해가고 있었다. 물론, 학교를 한 번도 다녀본 적도 없고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는 마모루가 수업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높낮이 없는 영어 선생님의 목소리는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게 했다. 마모루는 잠시 눈을 감고 구제반 팀원들과 아침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어쩐지 그리워지는 기분에 마모루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어쩌다가 여기에 오게 된 걸까? 타카이 군이나, 미사키 군.. 구제반의 팀원 모두 나처럼 이곳에 온 걸까? 학교라는 거 다녀보고 싶긴 했지만, 이렇게 모두와 떨어져있으니까 어쩐지 무서운 걸! 돌아가고 싶어・・・. 다들 좋은 친구들이지만, 그래도 모두가 보고싶은 걸・・・.’


자신이 왜 여기에 오게 된 건지에 대해서 풀어내지도 못한 채로 보내는 6교시였다.


 †††††


 분명 구제반의 아지트에서 잠을 자고 있던 마모루가 눈을 떠보니, 자신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나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이곳이 구제반의 아지트가 아니라는 것과 굉장히 낯선 환경이라는 것이다. 칠판과 많은 책상들을 보고 있자니 이전에 노조미에게서 들었던 학교라는 곳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일어나 교실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거울을 보게 된 마모루는 그만 놀라서 소리 치고 말았다.


“에에?!!”


잠들 때 입고 있던 두더지 잠옷이 아닌 깔끔하게 다려진 짙은 남색의 마이와 와인색의 넥타이, 그리고 깔끔한 셔츠와 마이색과 같은 색의 바지와 조끼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자신의 다리와 팔을 모두 살핀 마모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구제반 팀원들은..? 우리 팀복은 또 어디로 가고, 이런 옷을..’


혼란스러움의 연속들이 마모루의 사고회로를 정지시켰다. 마모루가 어버버 거리고 있을 동안, 한 쪽에서는 일종의 모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야야, 쟤는 누구야?”
“몰라. 전학생 아니야?”
“전학생이면 보통 선생님이랑 같이 오지 않냐?”
“뭐, 주목 받는 게 싫다고 하면서 온 거 아니야?”
“그런가.. 근데 전학생 온다는 이야기 없었는데.”
“뭐 어때! 귀엽게 생겼으니까 장땡이지!”
“야, 넌 정말 그게 다냐? 별로 귀엽지도 않구만..”


당황한 마모루의 뒤로 한 여학생이 다가가더니 그의 등을 콕 찔렀다. 마모루는 누군가 자신을 조심스레 찌르는 느낌에 뒤돌아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저기..”
“어, 응!”
“넌 누구야...?”
“나는...”


일순간 반에 급작스러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모두가 마모루의 뒤 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꿀꺽. 개중에는 침을 삼키는 소리도 들렸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마모루는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연다.


“나는 마모루라고 해. 넌?”
“아! 만나서 반가워, 마모루. 난 와타 코우하네라고 해! 전학생이야?”
“전, 학생..?”


마모루는 전학생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학생이라는 말의 뜻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그의 태도에 같은 반에 있던 친구들도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쟤, 전학생이라는 말을 모르나..?”
“에이. 고등학생이나 됐는데 전학생이라는 말을 모를 리가 있겠냐. 아니면, 존재감이 너무 없어서 우리가 이제야 알아챈 같은 반 친구 아닐까?”
“웃기시네. 너처럼 못생긴 것도 아니고 저렇게 귀여운 애가 존재감이 없을 리가 없잖아.”
“말 다 했냐?”


마모루의 귀에 이런 대화들이 들려왔다. 자신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것만 같은 주변 분위기에 어쩔 줄을 모르던 마모루는 입을 열었다.


“전학생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떠 봤더니 이곳에 있었어. 여긴 대체 어디야?”


마모루의 말에 반 친구들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고등학생이나 됐으면서 전학생이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말이 돼? 라며 수근거리는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모루에게 말을 걸었던 코우하네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한 남학생이 나오더니 말했다.


“여긴 모리다테(守盾) 고등학교야. 전학생이라는 말을 모른다니, 너 고등학생 맞아?”


의심과 경계가 가득한 눈초리로 마모루를 쳐다보며 말하는 남학생이었다. 반 친구들의 분위기는 마치 남학생이 자신들을 대변해 줬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반 분위기 속에서 마모루는 눈을 연신 깜빡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 고등학생 아니야. 구제반에서 팀원들과 함께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로 오게 된 거야. 전학생이라는 단어 배운 적도 없고.”


마모루의 말에 다시 한 번 교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구제반? 그건 또 뭐야. 고등학생도 아닌데 우리 학교 교복은 어떻게 입고 있는 거지? 등등 그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진 학생들이 많았다.


딩동댕동-. 종이 울리고 친구들은 그가 누군지에 대해서 토론 하던 것을 멈추고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남은 자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모루는 일단 그곳에 가서 앉았다. 앉아서 생각을 해보니, 자신이 눈을 떴을 때 엎드려 있던 자리였다. 마모루는 마치 자신이 이곳에 왔어야만 했다는 착각이 일어나는 기분을 느꼈다.


그 때, 교실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에 맞춰 안경을 쓴 여학생이 일어나더니 외쳤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하세요.”


모두가 고개를 숙여 선생님께 인사할 때, 마모루는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모루는 불리지 않았다. 같은 반 친구들은 전학생도 아닌가 본데? 하며 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안 온 사람은 없는 거지?”
“선생님, 안 온 사람은 없는데요. 저 친구는 누구에요? 새로 온 전학생인가요?”


한 친구가 마모루를 가르키며 말하자,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변하더니 모든 시선이 마모루에게로 집중했다. 그 때,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아, 출석부에 이름 넣는다는 걸 깜빡했네. 전학생이다. 나와서 자기소개 간단하게 하고 들어가도록.”
“나?”
“그래, 너. 교실 오기 전에 교무실에 왔다 가야 할 거 아니야. 참나..”
“어어.....”


마모루는 쭈뼛쭈뼛 걸어나가, 교탁 옆에 섰다. 그리고는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때, 코우하네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을 따라하라는 것처럼 큰 소리로 자기소개하기 시작했다.


“안녕, 나는 와타 코우하네라고 해. 좋아하는 건, 귀여운 거랑 소고기!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는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주변 친구들은 왜 네가 자기소개를 하냐며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마모루는 ‘자기소개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안녕, 나는 마모루라고 해. 어.. 좋아하는 건 햄버거랑 팀원들! 학교 다녀본 적 없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마모루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친구들은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부는 등 환호를 해주었다. 개중에는 “어서 와!”라던지 “나도 잘 부탁해!”라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마모루는 그런 친구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구제반의 팀원들과 떨어져서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하였던 마음은 여기서 친구들과 지내고 있다 보면 구제반 팀원들이 데리러 와줄 것만 같다는 생각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게다가 다들 같은 옷을 입고 있으니 또 다른 팀원이 된 것만 같아, 마모루는 안심이 되었다.


“특별한 변동사항 없으니까, 각자 공부할 거 하고. 마모루, 너는 선생님 따라와라.”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 마모루가 그 뒤를 쫓아서 간다. 광대뼈까지 내려온 듯한 다크서클, 산발인 머리, 흘러내린 안경을 안 올린 모습. 언뜻 봐도 무심해 보이는 이 남자 선생님에 마모루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구제반 팀원들이 없어서 그런가 긴장이 되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교무실 문을 열고 선생님과 함께 들어갔다.


“네가 앞으로 쓸 교과서는 저기에 있으니까 가져가면 되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날 찾아오도록. 아, 그러고 보니 이름을 말 안 해줬구나. 내 이름은 쿠로사키 쇼토, 담당 과목은 수학으로 앞으로 너의 담임 선생님이다.”
“잘 부탁해, 쿠로사키 군!”
“.. 쿠로사키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경어 쓸 줄도 모르는 거냐.”
“경어?”
“하아....”


경어라는 개념을 배워본 적 없다는 듯 마모루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쇼토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모루는 속으로 ‘배운 적이 없는 걸!’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쇼토는 마모루에게 귀찮다는 듯 손짓을 휙휙 하며 말했다.


“교과서 들고 가서 1교시 수업 준비해라.”
“응!”


마모루는 동전, 잠옷, 햄버거 이외에도 자신의 것이 생겼다는 것에 대해서 묘한 기쁨을 느꼈다. 얼핏 봐도 10권은 족히 돼 보이는 교과서들을 들고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


 “근데, 여기에 햄버거 있어?”
“햄버거?”


자기소개하는 것부터 해서 학교 안내도 해줬던 코우하네에게 마모루가 처음으로 먼저 건넨 말이었다. 햄버거는 마모루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식량이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공복이 마모루에게 다가왔다.


“음, 매점에 햄버거가 팔았던 것 같은데. 지금 가볼래?”
“지금 가도 되는 거야?”
“아니면 다음 시간이 바로 점심시간이니까 같이 매점 가자!”
“어, 너네 점심시간에 매점 가게?”
“나도 갈래, 나도!”
“나도 도시락 안 가져왔는데, 끼워줘.”


마모루의 주변으로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자기소개를 하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친구들을 보고 있던 마모루는 구제반을 떠올렸다. 자신의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같은 유니폼을 입고 지냈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마모루는 그리운 감정과 다가와 줘서 기쁘고 고마운 감정을 담아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러자 마모루의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그럼 다 같이 이따 매점 가는 거지?”, “나 마모루 군이랑 친해지고 싶었는데!”라고 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자신을 경계했던 아침과는 상반된 분위기에 마모루의 마음도 점차 친구들에게 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모루 군은.. 우리 학교로 오기 전에 어느 학교 다녔었어..?”
“난 학교 안 다녔었는데?”
“에?”


마모루의 해맑은 대답에 순식간에 친구들 사이에는 정적이 내려 앉았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안 다녔던 거야...?”
“그런 건 모르겠는데.. 아마존 잡으러 다니기만 했어!”


친구들은 마모루의 말을 듣고 서로를 쳐다보더니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분명 ‘아마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친구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 한 여학생은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이미 눈물을 떨어뜨리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을 마모루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들 왜 그래?”
“아니.. 아마존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어떡해. 마모루 군.. 그런 악덕 고용주 밑에서 있던 거야..?”
“아동 노동력 착취 반대!!”


마지막 친구의 말 이후로 친구들이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우는 친구들은 다들 “마모루 군, 어떡해!!”를 외치고 있었다. 그 중에 몇 명은 “아동 노동력 착취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이 난장판에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고 있던 친구들이 다들 마모루 주변으로 오더니 물었다.


“얘네 왜 이래?”


마모루는 자기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엉엉 울던 친구들 중 한 명이 마모루의 어깨를 잡으며 굳은 결의를 다진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내가 공부 도와줄게, 마모루 군!”
“어, 나도! 나도!”
“나는 영어 잘 해!”
“역사라면 나한테 맡겨줘.”
“좋아!! 그럼 우리 오늘부터 마모루 군 공부 도와주기 프로젝트를 진행하자!”
“오-!!”


순식간에 반 분위기는 ‘마모루 공부 도와주기 프로젝트’ 실행 계획 짜기로 후끈후끈해졌다. 그 때, 딩동댕동-, 종이 울리자 친구들은 “아, 타이밍 최악.”이라고 투덜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마모루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걸 알 수 없었지만, 친구들이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해서 기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넘쳐 흐르기 시작해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하세요.”
“그래. 교과서 58페이지 펴고, 전학생이랑은 잘들 지내고 있냐?”


마모루는 쇼토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전학생’이라는 단어를 듣고 알아챘다. 가슴 속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아마존을 구제하고 나서 느끼는 뿌듯함과는 또 다른 감각에 마모루의 입꼬리는 자동으로 올라갔다.


“선생님! 저희 완전 친해졌어요! 이따 점심도 같이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첫날부터 적응 잘 했다니 다행이네. 앞으로도 잘들 지내. 수업 시작한다.”


마모루는 구제반 팀원들 이외에도 자신과 같이 밥을 먹을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숨길 수 없이 기뻤다. 외계어처럼 보이는 수학 기호들을 보면서도 마모루는 웃었다.


 †


 “마모루 군! 마모루 군!”
“으응..”


어느새 잠들어버린 마모루의 어깨를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마모루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비볐다.


“빨리 일어나! 점심 먹으러 가자!”
“응!”


일어나자마자 느껴진 허기에 굶주린 배를 쓸고 있을 때, 마침 점심 먹으러 가자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마모루는 벌떡 일어나더니 이미 교실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 갔다.


“마모루 군-, 엄청 잘 자더라?”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더라고!”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마모루에 친구들은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에 따라 마모루도 친구들과 함께 웃었다. 개중에는 “맞아, 수학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니까?”, “완전 동감. 영어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마모루는 그런 그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구제반만큼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낯선 곳에서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구제반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마모루는 이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으면 분명 구제반 팀원들이 데리러 와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아갈 때 내가 수학을 풀고, 영어를 하면 다들 어떤 반응을 보일까? 빨리 돌아가서 자신이 이곳에서 공부한 것들을 구제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앗, 맞아. 점심시간에는 매점에 사람이 많으니까, 가위바위보에서 진사람이 대표로 가서 사 오는 건 어때?”
“아! 좋다, 좋다!”
“나도 찬성.”
“마모루 군은?”
“나도 좋아!”
“좋아-, 그럼 다들 보! 에 내는 거다?”


비장함이 맴도는 분위기에 마모루도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준비 자세를 취했다.


“가위-, 바위-, 보!”
“앗싸!”
“마모루 군, 당첨!”
“으아-, 싫어-..”


마모루는 자신이 낸 가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기 싫은데.. 마모루가 중얼거리고 있자, 한 친구가 말했다.


“근데, 마모루 군은 매점 처음이니까 내가 대신 다녀올게.”
“정말?!”
“응. 대신 다음번에는 마모루 군이 가기야.”
“응!”


친구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마모루에게 말했다. 어린아이가 신난 것처럼 활짝 웃던 태도가 아까 전 인상을 찌푸렸을 때와는 많이 달라서 어쩐지 귀엽기까지 했다. 친구들이 하나하나 자신들이 먹을 메뉴를 말하기 시작했다. 마모루는 물론 거침 없이 “햄버거!”라고 외쳤다.


“자! 다들 각자 메뉴 가져가!”


어느새 먹을 걸 잔뜩 사 온 친구가 말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고마워.”라고 말하며 자신이 주문했던 것들을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마모루의 햄버거만이 남았을 때, 친구는 마모루에게 햄버거를 내밀었다.


“고마워!”
“그럼 우리 이제 어디 가서 먹을래?”
“이런 날에는 옥상이지-.”
“하긴! 요새 날씨도 좋고!”
“그럼 옥상으로 출발!”


마모루에게는 처음인 것 투성이라 설렘이 가득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내내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밥 먹는 것에 대해 잔뜩 기대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솜사탕처럼 두둥실 뜨는 이 기분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발걸음마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자자, 다들 앉자!”


옥상으로 발을 내딛자,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상쾌하고 달콤한 바람이 마모루를 훑고 지나갔다. 옥상에는 작은 화분들이 있었다. 마침 꽃봉오리가 핀 것들이 많았다. 마모루는 이리저리 훑어 보며 매점표 햄버거의 포장을 뜯어냈다.


“잘 먹겠습니다!”


다 함께 합장을 하며 외쳤다. 마모루는 들뜨는 마음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하고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햄버거와 팀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함께 따뜻한 햇살을 쬐며 보내는 시간은 마모루의 경직되어있던 마음을 완화시켜주었다.


여기서 이렇게 햄버거를 먹으며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마모루의 마음에서는 어여쁜 꽃 봉오리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가면라이더 아마존즈 시즌 2
치히로+이유
주전자

치히로, 즐거워.


 “이-윽고, 별이 내리-네. 별이 내릴 즈음-.”


잔잔하지만 어딘가 아픔이 느껴지는 목소리들이 조리실에서 흘러나왔다. 치히로와 이유가 가정 실습으로 케이크를 만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던 것이었다. 치히로는 이유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케이크를 만들었고, 이유는 표정 하나 없이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이유, 이 딸기도 올리자.”
“알겠다.”


치히로는 딸기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고 오더니, 이유의 손에 있는 생크림 짤주머니를 가져가더니 실습 중인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딸기를 이유의 손에 쥐여줬다. 이유는 딸기를 슬쩍 보더니 잘 발린 생크림 케이크 위에 딸기를 하나 둘 올렸다. 치히로도 이유를 따라 케이크의 가장자리에 딸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치히로.”
“응?”
“즐거워.”


치히로는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이유의 ‘즐겁다’라는 말은 치히로에게 있어서 소중한 말이었다. 서로가 인간임을 알게 해주는 말, 이유가 살아있는 인간임을 치히로가 확신하게 되는 말이었다. 그만큼 소중하고 기뻐지는 말이었다.


치히로에게는 더는 이 학교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유와 함께 있고, 이유가 지금 이곳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돌아가지 않았도 좋았다.
이유가 이곳에서 사람으로 있을 수 있다면.


 †††††


 “여긴...”
‘분명 이유와 함께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치히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떠올려내기 시작했다. 이유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희고 눈부신 빛이 바이크와 자신을 덮쳐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 곳에 와 있었다. 예전에 어머니께 들었던 바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이곳은 학교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왜 학교에...’


치히로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학교에 다닌 적도 없었다. 보내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타치바나 유고는 온통 하얀색으로 가득한 방에 자신을 가뒀을 뿐 외부 활동은 하지 못하게 했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치히로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이유가 자신의 곁에 없다는 것과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아침 인사를 하는 또래로 추정되는 사람들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불리자, 알 수 없는 울렁거림과 두근거림이 치히로를 뒤덮었다.


“치히로, 좋은 아침.”
“저기.. 날 알아?”


용기 있게 건넨 첫마디였다.


“당연하지. 너 나랑 같이 점심도 먹고 그랬잖아. 교복은 어쨌냐? 너 그러다가 선생님께 혼난다-.”


돌아온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치히로는 자신이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는 것과 어머니께 글자를 배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치히로가 하던 외부활동이라고는 팀 키스와 함께 지내면서 아마존을 구제했던 것과 4C에서 쿠로사키와 함께 아마존을 구제했던 것 뿐이었다.


그런 치히로에게 친구가 있을리가 만무했다. 혹시 팀 키스의 영상을 보고 자신을 아는 체 하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상한 건 한가지 더 있었다. 사람들을 봐도 식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느낌을 받았던 건 한 번 밖에 없었다. 이유를 볼 때만은 식욕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교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봐도 식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이유와 비슷한 사람들인 건가?’


치히로는 생각에 잠겼다. 불안한 눈빛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반 문을 열었을 때,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어딘가 익숙하고 소름 끼치는 모습이 치히로의 눈에 들어왔다.


“치히로 군, 교복을 똑바로 입지 않았군. 그리고 지금 종 쳤는데, 어딜 가려는 거지?”
“타치바나 유고..!!”


이유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타치바나 유고가 눈 앞에 나타났다. 지난 날들이 치히로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유는 건들지 말라니까! 치히로는 이를 으득 갈며 타치바나 유고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유는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이유? 치히로 군, 내가 누굴 건드렸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담임 선생님한테 이렇게 해도 된다고 배웠나?”
“담임 선생님? 수작 부리지 마! 당신 직업은 그게 아니잖아! 당신은...”
“야, 야. 그만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담임 선생님께 이건 아니지!”


아까 전 치히로가 말 걸었던 친구가 치히로를 잡아 뒤로 끌어 타치바나 유고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담임 선생님? 그게 뭔데. 타치바나 유고가 선생님이라고? 치히로는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신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타치바나 유고는 그런 치히로에게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얌전히 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해도 좋아.”


치히로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타치바나 유고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타치바나 유고는 치히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말했다.


“자, 반항은 이쯤하고 자리에 돌아가서 앉도록.”
“너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 어휴.. 빨리 자리로 가자.”


치히로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친구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앞으로 이유를 어떻게 찾아서 돌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나랑 같이 있었으니까, 분명 같은 학교에 있을 거야.’


 †††


 “치히로, 실습실 같이 가.”
“아, 응.”


점심시간 전 마지막 교시까지 치히로는 많은 것을 알아냈다. 학교의 이름, 그리고 이유와 비슷한 사람이 이 학교 안에 있다는 것까지. 쉬는 시간에 계속해서 타치바나 유고에게 불려 내려가는 바람에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는 걸 하지는 못했지만 건진 것들은 꽤 있었다.


지금 치히로는 가정 실습을 하러 가는 중이다. 마침 케이크를 만드는 실습을 한다기에 이유를 떠올렸다.


‘이유가 케이크 만드는 거 좋아하는데.. 이유는 어디로 간 거지..?’


자신이 봐도 유일하게 식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4C에 들어오기 전, 학교에 다닐 때 케이크 만들기를 즐겁게 했었다고 나가세에게서 들었던 적이 있었다. 직접 케이크를 사다 줬을 때도 이유는 즐겁다고 했었다. 실수로 이유의 얼굴에 케이크를 쏟았었지만 이유는 즐겁다고 했다. 그래서 치히로는 케이크를 떠올리면 이유부터 떠올랐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치히로의 옆에 없었다. 치히로는 이유가 혹시라도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조금씩 걱정이 되었다. 일정한 시간 안에 단백질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근데 있잖아. 오늘 가정 실습 수업 옆 반이랑 같이 하잖아. 그 반에 네가 찾던 그... 누구더라 아무튼 걔 있나 보던데? 성격 변했다고 여자애들이 얘기하는 거 들었어. 말을 걸어도 대꾸도 잘 안 해주고, 앞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던데.”
“뭐? 그 애, 우리랑 같이 수업해?”
“어.. 그런 것 같던데.. 그 머리 길고, 까만 옷 입고 있고, 키도 크다며. 이름도 두 글자고. 걔 맞는 거 아니야?”
“이유!”
“야, 야! 같이 가!!”


치히로의 불안감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이유가 같은 학교에 있다. 게다가 같이 이유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만들 수 있다 라는 사실에 치히로는 가정 실습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유!”


빠르게 도착한 실습실의 문을 벌컥 열며 치히로가 외친 단어는 ‘이유’였다. 눈 앞에 이유가 보이자, 치히로는 지금까지 보인 적 없던 미소를 보였다. 안도의 미소였다. 이유는 초점 없이 앞만 보고 있었다. 치히로는 이유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입을 열었다.


“이유, 팔은 괜찮아?”
“문제 없다.”


치히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유의 왼쪽 팔뚝을 살펴보며 말을 건넸다. 이유는 간결하게 답했다. 그러자 치히로의 눈에 포착된 것은 레지스터가 없어진 이유의 팔뚝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치히로는 자신의 눈을 부비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저기, 잠깐 밖에 나가서 이야기 좀.”


그때, 이유와 같은 반 친구라고 생각되는 여학생들이 치히로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치히로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여학생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유에 대해서 물어볼 게 조금 있는데.”
“... 이유,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알겠다.”


여학생들은 실습실을 벗어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이유에게 무슨 일 있던 거야?”
“이유 성격이 변했어! 말 걸어도 대답도 잘 안 해주고. 같이 뭔가를 하자고 하면 임무냐고 물어보고!”
“이유를 알아..?”


혼란스러운 감정이 다시금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유가 다녔던 학교는 여기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지? 애초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대체 이 학교 정체가 뭐지? 치히로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질문들이 어지럽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치히로의 표정을 본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너도 이유가 변한 거에 대해서 아는 게 없나 보네. 얘들아, 들어가자. 더 얘기를 해도 알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 나중에 이유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여학생의 한마디에 다른 여학생들이 실습실로 우르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치히로를 친근하게 대했던 남학생이 나와서 치히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쟤네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삥 뜯겼어? 아니, 그보다 네가 찾던 사람이 쟤야? 말 걸어도 대답 안 하던데..”
“...”
“야! 저 자식이.. 같이 가!”


치히로는 아무 말 없이 실습실로 들어갔다. 이유를 찾기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치히로는 이유와 자신에 대해서 아는 이 공간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종이 치고 가정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오늘은 지금 서 있는 테이블의 옆 테이블 사람들과 함께 케이크 만들기를 진행할 거예요.”


옆 테이블? 치히로는 자신의 옆에 있는 테이블을 보았다. 이유가 우두커니 앞만 보며 서 있었다. 치히로에게 말을 걸었던 여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치히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쁨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이유, 케이크 만든대. 즐거울 것 같지 않아?”


이유는 아무런 대답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살아있을 때의 기억들. 친구들과 함께 케이크를 만들고, 실수로 선생님의 얼굴에 케이크를 뭉개버렸던 일들이 이유의 눈 앞에서 재생되었다.


“이, 윽고.. 별이 내리네.. 별이 내릴 즈음.. 마, 음이.. 두근거리네.. 두근거리기 시작하네..”
“이유..”


이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치히로는 이유의 노래를 듣고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마음 한 쪽을 아프게 하는 그 노랫소리에 치히로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럼, 자유롭게 만들기 시작하세요.”
“이유, 케이크 만들기 시작하자.”
“알겠다.”


 †


 어느덧 치히로와 이유의 케이크는 딸기까지 얹어져서 제법 맛있어 보이는 비주얼을 띠고 있었다.


“이유, 초콜릿도 얹자.”

“알겠다.”


이유는 동그란 초콜릿을 들더니 케이크의 중앙에 얹었다. 예전에 만들었던 비슷한 모양새. 이유는 한 번 더 예전의 기억을들 떠올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치히로는 박수를 치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 이거 봐, 완성이야!”


이유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케이크를 바라보며 예전 기억을 다시 재생시킬 뿐이었다. 치히로가 이유의 볼에 생크림을 묻혔다. 치히로는 생크림 묻은 이유를 보며 웃었다. 이유와 케이크를 만든 시간들이 행복해서, 이유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어서, 이유와 장난치는 것마저 즐거웠기 때문에 웃었다.


그때, 이유가 입을 열었다.


“치히로, 즐거워.”


가면라이더 에그제이드
파라드+뽀삐 삐뽀빠뽀
주전자

 CODE NAME: SHC


 “여기는 대체 어디지?”


뽀삐 삐뽀빠뽀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다. 파라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새로운 가샤트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오류는 없는지를 파악을 해달라는 단 쿠로토의 부탁으로 가샤트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모르는 곳에 빨려 들어오게 되어버렸다.


“에, 에엑-?!!!!”
“왜 그래 뽀삐!”
“코스튬이...!”
“코스튬?”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가 언제나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화려하지 않은 네이비색 마이와 조끼, 그리고 흰 셔츠에 붉은 와인 빛 넥타이를 메고 네이비색 치마 혹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밖으로 나가려고 애를 써도 나갈 수가 없었다.


“겐무가 또 무슨 짓을 했나 봐.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어.”
“쿠로토...”


딩동댕동-. 그때 종이 울렸다. 어디로 가야 하지?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가 우왕좌왕하고 있던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그들을 툭 쳤다. 흠칫 놀라며 천천히 뒤돌아보니,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교실에 안 들어가?”
“에, 교실?”
“에에?!! 그럼 여기가.. 학교, 라는 거야?”
“너네 잠이 아직 덜 깬 거야? 어휴... 어쩔 수 없이 내 특제 우유를 줘야 하는 건가?”


여학생은 한숨을 쉬더니 잠깐 기다려 봐, 라고 말을 했다. 자신이 들고 있던 파란 책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뽀삐 삐뽀빠뽀가 자신의 양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을 슬쩍 내리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네 이름이 뭐야?”


쿠궁! 책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던 여학생은 충격적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뽀삐 삐뽀빠뽀는 자신이 말 실수라도 했는지 다시 생각해봐도 말한 거라고는 이름 묻는 거 밖에 없었다. 파라드는 뽀삐 삐뽀빠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쟤... 왜 저래?”


그렇게 물어도 뽀삐 삐뽀빠뽀는 아는 게 없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뭐, 그래. 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거기 셋! 아직도 반에 안 들어가고 뭐하냐. 지각 처리한다?”
“앗, 죄송합니다! 이따 다시 얘기하자.”
“으, 응!”


급작스러운 선생님의 등장에 여학생은 후다닥 반으로 들어갔다.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도 아는 게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여학생을 따라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찾아낸 맨 뒷자리에 있는 빈자리 두 개. 그들은 그 자리에 일단 앉기로 했다.


그러자 앞문으로 방금 전에 봤던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들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주변 친구들이 꾸벅 인사했다.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도 그들을 따라 인사했다.


“출석부터 부르겠다.”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뽀삐?”
“나도 잘 모르겠어... 쿠로토가 무언가를 또 꾸미고 있는 걸까?”
“……, 파라드. 파라드?”


파라드는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을 알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왜 불린 거지? 파라드는 여전히 영문도 모른 채 있었다. 미어캣처럼 두리번 거리는 파라드를 발견한 선생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파라드, 대답은?”
“아, 응!”
“... 뭐, 그래. 그 다음이.. 뽀삐 삐뽀빠뽀.”
“응!”
“... 너희 둘은 잠시 이 시간 끝나고 날 따라 나와라. 이상.”
“차렷, 선생님께 경례!”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는 서로를 쳐다봤다. 뭐가 잘못 됐나? 갸웃갸웃 거리던 그들은 선생님의 말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말의 내용은 간단했다. 경어를 쓰는 게 기본 예의 아니냐며 꾸중하는 것이었다.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에게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동등하게 보였다. 나이가 많든 적든 그 성별이 무엇이든. 모두가 친구였고, 함께 게임을 할 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경어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경어를 쓰라는 요청이 들어온 이상, 쓸 수 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다른 선생님들한테까지 예의 없이 하면 안 되니까 말 해주는 거야.”
“네!”
“이만 들어가 봐.”


그들은 그렇게 다시 반으로 들어왔다. 아까 전 복도에서 그들에게 말을 걸었던 여학생이 다가왔다. 뽀삐 삐뽀빠뽀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아까, 저 친구가 어디서 대답을 했더라? 드디어 기억이 난 뽀삐 삐뽀빠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있지! 나, 네 이름 알아!”
“기억 난 거야?”
“응! 단 사쿠하네지?”
“에, 뽀삐 그건 어떻게 안 거야?”


뽀삐 삐뽀빠뽀는 어리둥절한 파라드에게 활짝 웃어 보이기만 했다. 단 사쿠하네는 기쁜 듯이 보였다. 파라드는 또 얘는 왜 이렇게 기뻐하는 거지? 싶었다. 그저 이 모든 상황들이 파라드에게는 당황스럽고 아직은 적응하기 힘들 뿐이었다.



 †††††



 “이 신의 재능으로 새로운 가샤트를 만들었다! 붸헤헤헤헥!!!”


CR에 인간이라고는 없는 새벽 시간. 단 쿠로토의 웃는 소리가 CR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반향음이 시끄러운 나머지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인상을 풀고 새로운 가샤트라는 말에 단 쿠로토가 있는 게임기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새로운 가샤트? 마음이 들뜨는데!”
“에에-?!!! 새로운 가샤트? 어떤 게임의?”
“이름하여, CODE NAME: SHC!”
“CODE NAME:SHC? 그게 무슨 게임인데?”
“학교에서 하나둘 죽어가는 친구들과 그 원인에 대해서 추리, 추적해 범인을 찾아내서 범죄의 사슬을 끊는 추격 서스펜스 게임이지.”
“에, 무서워!!”


단 쿠로토는 가샤트를 보여주며 웃었다. 하지만 그의 뱀 같은 표정 때문인지, 게임의 내용 때문인지 뽀삐 삐뽀빠뽀는 잔뜩 겁이 먹은 상태로 파라드의 뒤에서 숨어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일순, 단 쿠로토는 상처 받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가샤트에 이상이 있을 리는 없지만.. 만일이라는 것이 있으니, 자네들이 테스트로 변신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돼?”


파라드는 신난 듯 웃으며 단 쿠로토에게 되물었다. 뽀삐 삐뽀빠뽀도 어느덧 파라드의 옆으로 나와서 조금은 신이 난 것처럼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그러자 단 쿠로토가 게임기에서 밖으로 나와,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한 손에는 가샤트 두 개를 들고 거만하게 내밀었다. 단 쿠로토의 손가락 끝에서 가샤트가 흔들흔들 거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 신의 재능으로 만든 가샤트를 가장 먼저 플레이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기회를 주도록 하지.”
“고마워, 겐무.”
“.. 고마, 워.”


뽀삐 삐뽀빠뽀는 거만한 단 쿠로토를 노려보더니 단 쿠로토의 손가락에 걸려있는 가샤트를 하나 빼 왔다. 파라드는 새로운 가샤트라는 소식에 마냥 신난 것처럼 보였지만. 두 사람은 게임 에리어를 바꿔, CR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가샤트의 버튼을 눌렀다.


「CODE NAME: SHC!」


가샤트 기동음이 나왔다. 그리고는 갈색 빛으로 게임 에리어가 깔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동시에 변신! 이라고 외치는 순간 뒤에 켜져 있던 게임의 시작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으아아!”
“파라드!”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파라드는 어질어질 했다. 이전에도 게임 시작 화면을 통해 게임 안에 다녀온 적 있는 뽀삐 삐뽀빠뽀는 파라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라드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뽀삐 삐뽀빠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둥실 떠오르는 감각이 느껴지며 천천히 발을 뻗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그렇게 그들은 사쿠라엔(桜園) 고등학교에 오게 되었다.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할지는 명확해졌다.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는 게임을 클리어 하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겐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게임 설명했던 거?”
“응.”
“으음.. 그러니까... 학교에서 쓰러지는 친구들을 구해주는 게임!”
“그런 게임이었던가?”
“뭔가를 추리 하는! 추격 서스펜스 게임, 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으으... 삐뿌뻬뿌 패닉이야!”
“아! 기억 났어! 학교에서…….”


파라드가 기억 난 걸 말하려는 순간, 딩동댕동-, 수업 종이 울렸다. 파라드의 말도 끊겼다.


“정말 타이밍 안 좋네!”
“어쩔 수 없지. 이따 다시 얘기하자, 뽀삐.”
“응!”


그들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학교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전 쉬는 시간까지는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쳐도 이야기를 나눴었지만, 한 번 혼이 나서 그런지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반장이 “차렷! 선생님께 경례!”라고 하면 자연스레 꾸벅 인사를 했고, 경어도 잘 사용했다. 파라드는 수업 시간에 조용히 엎드려 있거나 낙서를 하고 있었다. 뽀삐 삐뽀빠뽀는 그런 파라드의 옆에서 어떻게든 수업에 집중 해보려고 노력했다. ... 물론, 온전히 집중한 건 아니었다.


어느덧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파라드는 다시 이야기를 했다.


“겐무가 학교에서 친구들이 하나둘 죽으면, 그 이유에 대해서 찾아내는 거라고 했어! 범인을 찾아서 없애면 클리어 하는 거라고 그랬어!”
“에에?!!!!”


뽀삐 삐뽀빠뽀의 큰 목소리에 같은 반에 있던 친구들의 시선이 모두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에게 꽂혔다. 뽀삐 삐뽀빠뽀는 “앗, 미안!”이라고 하며 헤헤 웃었다. 그제서야 친구들의 시선은 다시 분산되었다. 뽀삐 삐뽀빠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작게 말했다.


“그치만.. 아직 죽은 친구는 없는 걸?”
“아직 제대로 된 게임이 시작 안 된 게 아닐까?”
“그런가?”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에 계속해서 게임이 진행이 안 되면 못 돌아간다는 건가? 뽀삐 삐뽀빠뽀는 고민했다. 파라드는 그런 뽀삐 삐뽀빠뽀를 바라보면서 얘기했다.


“걱정 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즐겁게 게임하면 돼! 지금까지 그랬잖아.”
“응!”


파라드는 웃었다. 뽀삐 삐뽀빠뽀도 마주 웃었다. 그때, 단 사쿠하네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친구들과 함께.


“파라드, 뽀삐. 점심 먹으러 안 가?”
“앗, 맞아! 그치만 우리 도시락이..”
“뽀삐, 가방.”


파라드가 뽀삐 삐뽀빠뽀를 조용히 부르더니 책상 옆에 있는 가방 걸이를 가리켰다. 왔을 때부터 있던 가방. 파라드는 이미 그 가방을 한 번 살펴봤는지, 빨간색과 파란색이 함께 있는 도시락을 꺼내놓고 있었다. 뽀삐 삐뽀빠뽀도 그런 파라드와 도시락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다가 이내 가방을 열었다. 뽀삐 삐뽀빠뽀는 가방에서 자신이 입고 다니던 코스튬 옷 색과 비슷한 색 조합의 둥글둥글하게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꺼냈다. 보자기를 살짝 풀어보니, 안에 핑크색과 초록색 그리고 노란색 음표들이 그려져 있는 도시락 통이 보였다.


“우와! 이것 좀 봐, 파라드!”
“이것도 봐봐, 뽀삐. 나는 퍼즐 모양이야.”
“우와!!”


뽀삐 삐뽀빠뽀는 연신 감탄을 하며 박수를 쳤다.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는 생전 가져본 적 없는 도시락을 갖게 되어서 기뻤다. 어딘가 즐거운 기분까지 슬금슬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단 사쿠하네는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얘들아, 친구들 기다리는데.”
“아, 응! 가자!”
“뽀삐, 같이 가!”


그렇게 6명이서 벤치로 향했다. 책상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3명씩 나눠서 앉았다.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는 마음이 들뜬 듯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고 도시락의 뚜껑을 열었다.


“잘 먹겠습니다!”


6명이서 동시에 외쳤다. 사실상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는 밥을 먹지 않아도 괜찮지만, 어째서인지 먹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젓가락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게임을 직접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즐거웠다.


친구들과 하는 대화는 게임 스토리 진행과는 모두 연관이 없었다. 국어 선생님 목소리 완전 asmr 아니었냐, 그건 역사도 마찬가지다, 수학 진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 등등의 흔하고 평범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는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는 점심을 함께 먹었던 친구들의 동아리 활동을 구경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그들은 수다를 떨며 학교 밖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교문 밖으로 한 발자국 내밀었을 때, 급작스럽게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의 몸은 붕 떴다. 방금까지 수다 떨던 친구들은 멈춰있었다. 하늘이 갑자기 갈색 빛이 돌더니 방금까지 있던 학교, 거리, 친구들 그리고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까지 갈색 빛에 삼켜졌다.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는 다시 한 번 소용돌이 치며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파라드도 당황하지 않고 뽀삐 삐뽀빠뽀에게 손을 뻗었다. 뽀삐 삐뽀빠뽀는 그런 파라드를 보고 웃으며 손을 잡았다. 둥실, 하는 느낌이 들자 발을 뻗었다.


그러자 보이는 풍경은 너무나도 익숙한 CR의 풍경이었다. 단 쿠로토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 신 단 쿠로토가 실수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가샤트의 오작동이었다. 게임 스토리도 너희가 들어가니 멋대로 바뀌더군. 보완 해야겠어.”
“그래도! 즐거웠어! 그치, 파라드?”
“응! 다음 번에는 제대로 플레이 해 보고 싶어.”
“그치! 나도 학교 가고 싶다-!”


파라드와 뽀삐 삐뽀빠뽀는 와아!! 학교! 라고 하며 단 쿠로토의 주변에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단 쿠로토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가 즐거운 듯 수다 떨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띄었다.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단 쿠로토가 선물한 뽀삐 삐뽀빠뽀와 파라드의 학교 생활은 단 하루 뿐이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영원히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이다.


가면라이더 지오
토키와 소고

학교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가면라이더 지오-토키와 소고가 낯선 학교에 떨어진다면


 소고는 보통의 사람들이 믿기지 않은 광경을 마주했을 때 취하는 행동을 답습했다. 눈을 강하게 비비다 못해 약간 붉어진 눈을 뜨고 다시 학교의 광경을 보았을 때, 배경은 소고의 기대를 비웃듯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시간의 마왕이 되는 무지막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 토키와 소고는 자신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다.


 소고는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자전거를 비스듬히 세워 놓고는 빠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언제나와 같이 아슬아슬하게 일어나 할아버지가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늘 타던 자전거를 타고 언제나 가던 길을 지나왔다. 자신의 아침은 다른 날과 아무리 비교해봐도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고, 완벽하다면 완벽한 아침 일과의 끝에는 자신의 모교인 히카리가모리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전혀 다른 학교와 전혀 다른 아이들, 전혀 다른 선생님이 운동장을 지나갔고, 간간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며 지나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학생들은 소고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런 소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벚나무는 배시시 웃으며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한 학생이 지나가다가 소고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돌아왔다. 소고는 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중얼거리며 생각하고 있었다. 그 학생은 소고를 빤히 바라보다가 소고의 어께를 툭툭 쳤다. 소고는 그제서야 그 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학생은 소고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방긋 웃었다.


 "야, 뭐 하고 있어. 얼른 가야지."


 "어, 어?"


 아직 사태 파악의 '사' 자 도 끝내지 못한 소고의 가방끈을 잡고 소고를 일으킨 학생은 무단으로 소고의 자전거를 탈취해서 쌩 하고 타고 갔다. 소고는 당황을 넘어서 어이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잡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학생을 따라서 천천히 학교를 향하던 소고는 그제서야 학교의 간판을 볼 수 있었다. 간판은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마구 망쳐놓았다고 의견을 피력해도 묵살당하지 않을 만큼 심하게 망가져있었다. 그래서 학교 간판을 통하여 학교의 이름을 알아보자는 결심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온 히카리가모리와는 전혀 다른 학교라는 점은 확실했다.


 "뭔가, 가야 한다는 기분이 드네."


 소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간 학생의 뒤를 천천히 밟았다. 학교 양 옆으로 밝게 핀 벚나무가 다시 한 번 수줍게 웃었다.


 소고의 자전거는 의외로 자전거 거치대에 잘 놓여 있었다. 그것도 자물쇠로 굳게 잠긴 채 말이다. 소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생일을 입력해보았고, 굳게 잠긴 자물쇠는 맥없이 탁 풀려버렸다. 다시 자물쇠를 잠근 소고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물쇠와 자전거를 바라보았다. 그 학생은 소고의 친구라도 되는 걸까? 자신의 생일마저 아는 학생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전거를 가져가 거치대에 걸어놨다. 마치 그 일이 소고가 등교할 때마다 간헐적으로 일어났었다는 일인 양.


 소고는 이 모든 일들이 점점 조화롭지 않게 맞물려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화롭지 않게 맞물려간다니? 소고는 제 표현에 제가 웃었다. 소고가 쓴 표현은 학교에서 배우던 역설, 뭐 그런 것이었다. 왕이 된다면서 항상 수업시간을 허투루 쓰고 있는데도 이런 건 기가 막히게 기억이 났다. 그래, 학교에 왔다면 일단 학교에 충실해져보자. 모든 것에 충실한 것은 왕의 자질이니까.


 소고는 일단 자연스러워지기로 했다.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소고의 발은 운명을 찾는 것처럼―여기에 온 것처럼―소고가 모르는 소고의 반도 찾을게 분명했다. 그렇게 소고가 택한 반은 3학년 B반이었다. B반은 한창 아침조회 중이었다. 자전거 걱정에 결국 지각해버린 소고는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뒷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갔다.


 겨우 연 뒷문이 열리는 소리를 어떻게 들은 건지, 아이들은 귀신같이 뒷문을 돌아보았다. 약 서른 쌍의 시선이 소고에게로 꽂혔다. 아이들의 표정은 격하게 환영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처지가 된 소고는 묘하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안경 낀 연배 있어 보이는 선생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경을 연거푸 올리며 소고에게 말했다.


 "토키와 군? 여기는 D반이 아니라 B반인데."


 "……실례했습니다!"


 소고는 부리나케 문을 닫았다. 잠시 간의 정적 후, 닫힌 문 넘어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고의 반은 B반이 아니라 D반이었던 모양이었다. 소고의 발은 방금 전까지는 소고가 원하지 않아도 운명을 잘 찾아가더니 운명을 찾아야 할 때는 놀리듯 운명을 비껴갔다. 역시 세상살이는 후세의 마왕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붉은 것을 넘어 까맣게 타들어가진 않았을지 걱정한 소고는 손에 난 땀을 바지에 닦고는 D반으로 향했다.


 B반과 D반의 거리는 꽤 멀었다. 상식의 선에서 생각하면 B반 다음에는 C반, C반 다음에는 D반이 있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학교의 교장은 조금 남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B반을 지나와, D반보다 F반을 먼저 만난 소고는 당황도 어이없음도 아닌 탈력을 느꼈다. 소고는 조금만 더 걸어보고 여전히 D반이 나오지 않으면 교장실에 가서 직접 따지자고 마음먹었다.


 교장에게 따질 거리를 정리하던 소고의 앞에 기다렸냐는 듯 D반이 불쑥 나타났다. 소고는 자신이 훌륭하게 짜놓은 여러 불만거리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버리게 되는 상황이 왔음에도 절망하기는커녕 기뻐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교실 안이 조용한 걸 보니 이미 1교시가 시작한지 꽤 시간이 지난 듯 했다. 소고는 눈을 꾹 감고는 뒷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D반의 아이들은 퍽 환영하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 긴 선생님은 소고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계속해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아마도 늦게 온 학생을 훈계하는 것보다 자신의 수업이 진행되는 것이 더 중요한 선생님인 것 같았다. 소고는 눈치껏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소고는 일단 선생님의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선생님의 입에서는 화자, 주제, 지향점이라는 말이 나왔으며 빈도수 높게 이 부분은 시험에 나온다는 말과 동의어인 말들도 나왔다. 소고는 잔뜩 긴장하며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운 좋게도 소고는 어렵지 않게 국어책을 찾아 꺼낼 수 있었다. 국어책을 무사히 꺼내고 필통을 집어든 소고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학생의 시선에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선생님이 헛기침을 하며 소고에게 눈치를 주었다. 소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죄송한 심정을 표현했다. 소고의 표현이 먹힌 것인지 선생님은 이번에도 별 말 없이 계속해서 수업을 진행했다. 두 번이나 수업의 맥이 끊겼는데도 그냥 지나가는 것을 보면 꽤 참을성 있는 선생님인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는 그 이후로도 계속 소고를 바라보았다. 소고는 목소리를 낮추고는 바라보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아이가 씨익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응했다.


 "왜 늦었냐?"


 "아, 누군가가 갑자기 자전거를 낚아채가서……."


 소고는 학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누군가'는 의기양양한 표정과 겨우 웃음을 참는다는 표정을 섞어서 지었다. 소고는 그 학생의 명패에서 '케이토'라는 이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케이토는 웃음을 숨기고 짐짓 진지한 척 팔짱을 하고 말했다.


 "설마, 내가 네 낡은 자전거를 훔쳐가기라도 했을까봐?"


 소고는 멍하니 케이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의 패배감이 느껴졌다. 케이토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소고에게 말 건 적 없다는 듯 몸을 돌려 필기하는 척 했다. 소고는 그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똑같이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소고를 화가 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학생들 대부분이 소고를 바라보고―물론 선생님과는 다르게,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있었다. 선생님은 차갑게 말했다.


 "토키와 소고. 끝나고 교무실로 오도록."


 "네에."


 소고는 그만 음이탈 난 목소리로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이곳저곳에서 웃음 참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은 소고를 보던 눈빛과 비슷한 날카로움으로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소고는 정말로 낭패감을 느꼈다. 소고는 교무실이 어디인지 몰랐다.


 소고는 교무실에 가야한다는 친구에게 자신의 사회성을 최대한 발휘해야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같이 가자는 말은 극한의 상황에서라면 생각보다 쉽게 나오는 말이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아르피나였다. 아르피나는 친절하게도 국어 선생님이 있는 자리까지 알려주었다. 자신과는 죽을 때까지 관계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정을 느낀 소고는 선생님께 혼나고 있음에도 마냥 기뻐했다. 교무실을 나올 때도 마침 비슷한 시기였다. 아르피나가 먼저 소고에게 다가왔다.


 "소고, 어제 케이토가 말한 건 어떻게 되었어?"


 소고는 다시 당혹감을 느꼈다. 이곳에서 알게 된 이름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일에 관계되어있다면 마왕이 되는 미래가 기다린다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놀라게 될 것이다. 소고는 이 순간, 그 일조차 알아내지 못하는 자신이 정말로 나중에 마왕이 되는 건가 의심하면서 반문했다.


 "그 일이라니?"


 "너네 집에서 자는 거 말이야. 할아버지께 물어본다며. 된다고 하셨어?"


 소고는 불행하게도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는 학교에서 일어난 모르는 일은 대답할 수 없었다. 소고는 지금 당장 지오 Ⅱ로 변신하여 미래를 엿보고 싶었다. 그러나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소고는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저절로 대답했다.


 "응. 된다고 하셨어."


 "아, 다행이다. 사실 어제 엄마한테 엄청 혼나서 너네 집으로 도망가려고 했거든."


 아르피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소고는 친구의 농담에 웃으면서도 자신이 한 행동에 의문을 가졌다. 내가 왜 된다고 했지? 그러다가 곧 이해했다. 쥰이치로라면 소고의 친구들이 몰려와서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그렇게 시끄럽게 구는 것도 좋아할 것이다. 손자를 아끼는 작은 할아버지는, 토키와 쥰이치로는 그런 사람이다.


 소고는 이번 수업이 수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절망했다. 약 50년 후의 저항군은 이 사실을 유념해두면 꽤 쓸 만할 것이다. 마왕의 절망은 생각보다 소소한 곳에 있었다. 절망 속에 빠져있던 소고는 곧 자신을 추슬렀다. 왕이 되려면 졸업을 해야 한다. 졸업을 하려면 수학도 열심히 해야 한다. 소고는 억지로라도 눈을 뜨며 숫자들을 바라보았다. 파이가 다리를 떨며 춤을 추었다. 9가 어느새 8이 되어 나비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0은 꼬리를 물고 기차가 되어 창밖으로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1은 사실 2이다. 2 더하기 5는 794였다. 8612 곱하기 59103은 곧 3이 될 것이다. 수학은 왜 더하기만 있을까. 0.999…의 마지막 9는 어떤 성격의 9일까. 선생님이 수학이 아니라 노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라벤더 향이 나는 것 같다. 더하기가 횡단보도가 되어―


―"정신 차려. 눈을 떠, 소고!"


 소고는 옆 친구가 웃으며 탁자를 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는 결국엔 수학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엎드려 잤음에도 불구하고 꽤 개운하다는 사실이 수학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렸다는 사실 정도는 잊게 만들어주었다. 뭔가 좋은 꿈을 꾼 것 같은 소고는 기지개를 하려 했고, 그 기지개는 누군가에게 막혀버렸다. 놀랐을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을 지은 채 방해물을 바라본 소고는 곧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케이토를 비롯한 학생 몇 명이 소고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소고는 무엇을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천천히, 소고는 이해했다. 그는 방긋 웃은 채 도시락을 꺼냈다. 그제서야 그를 둘러싸던 학생들이 따라 웃었다. 그들은 모두 오른손에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학교의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도시락을 먹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모두의 도시락은 추운 날씨에 걸맞은 따듯한 음식들이었다. 장난스럽게 옆 친구의 계란말이를 빼앗아먹다 걸려 한 대 맞는 친구를 보며 유쾌하게 웃던 소고는 묘한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래, 이런 것이 평화지. 소고는 지오로써 싸웠던 일들을 회상했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던 어나더 라이더와 자신의 미래 부하라며 자신을 마구 축복하던 한 신하, 그와 반대되게 미래의 자신을 증오하며 자신을 죽이려 그 먼 미래에서 시간을 거슬러 온 두 명의 친구…….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는 소고가 그리던 학교생활이었다. 선생님께 혼나도 푸념을 들어줄 친구가 있고, 같이 도시락을 먹으며 의미 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친구와 같이 하는 학교생활. 학교에서는 아니더라도 그 시간을 거슬러 온 친구들도 어느 정도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이름이 뭐였지?


 "소고, 뭔 생각해?"


 "응? 아무것도 아니야."


 소고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의미 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소고도 곧 그 이야기에 참여했다. 시시덕거리면서 그는 자신이 생각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사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토키와 소고는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자신의 집에 가서 무엇을 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소고는 아무래도 탈이 났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지도가 있음을 깨달은 소고는 영어 시간은 가볍게 버리고 보건실 가서 누워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도를 보고 따라가던 소고는 곧 길을 잃어버렸다. 지도가 있는데도 길을 잃을 정도면 학교의 구조가 얼마나 이상한지 증명할 수 있었다. 소고가 길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 위치조차 잊어버린 그는 일단 건물 밖으로 나오기로 했다. 약 12분을 헤맨 끝에, 소고는 겨우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중간에 길이 꼬인다면 차라리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푸는 것이 훨 낫다. 소고는 긴장하며 학교 안으로 굳은 발걸음을 내딛었다. 아니, 내딛으려고 했다. 어떤 키 큰 남자가 소고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소고는 나서고 싶어도 나설 수가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까딱이며 지도를 보았다.


 "보건실은 이쪽 코너에서 돌아서 앞으로 직진하면 바로 나와."


 지도 위에서 긴 손가락을 뻗어 세세하게 길을 알려준 그 남자는 소고가 고맙다고 하기도 전에 그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소고는 미묘하게 아픈 배를 살살 문지르며 남자가 알려준 대로 걸어갔다. 그 남자의 말이 맞았다. 보건실이 언제나 여기에 있었다는 듯 당당하게 서있었다. 보건실은 텅 비어있었다. 소고는 대충 진통제를 꺼내먹고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베개와 침대는 따듯했다. 소고는 수학 시간보다 더 빠르게 잠이 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저항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코를 찌르는 민트의 향기―

 ―"지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소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흔들어 깨운 것도 아니다. 그냥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져 일어나는 그런 기상이었다. 여전히 보건실에 선생님은 없었다. 대신 옆에 누군가가 누워있었다. 소고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소고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길을 가르쳐준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소고는 그 행동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듯 이불을 확 젖혔다. 


소고의 지레짐작은 얼추 들어맞았다. 소고에게 길을 가르쳐준 그 사람은 자고 있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읽고 있던 꽤 두꺼워 보이는 책은 그 사람에게 소중한 책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책을 소리 없이 탁 접었다.

 "이 짓이 무례하다는 짓은 알고 있을 텐데."


 "아하하, 그러게."


 그 남자는 자신을 쿼쳐라고 소개하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쿼쳐의 옆에 앉으라는 무언의 권유를 받은 소고는 언제나 짓던 웃음을 짓고는 쾌활하게 옆에 앉았다. 소고는 눈을 반짝이며 쿼쳐를 바라보았다. 한 쪽으로 넘긴 굵은 머리칼은 쿼쳐가 움직일 때 마다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소고가 옆에 앉았음에도, 쿼쳐는 책을 펼치고는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궁금증이 동한 소고는 돌발적으로 쿼쳐의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책, 어떤 내용이야?"


 질문은 겉치레라는 듯, 소고는 막무가내로 책을 바라보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소고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 사람이 애지중지하던 그 책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쿼쳐는 책이 아니라 공책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소고의 머리를 시야에서 치우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 쿼쳐의 시선은 분명히 책을 읽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혹시 자신은 읽을 수 없는 특수한 잉크로 쓰여진 책일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던 소고의 귀에 나긋한 목소리가 닿았다.


 "누군가의 일대기야. 역사서 또는 예언서지."


 "그 말 되게 모순적이네. 역사서는 과거를 기록한거고 예언서는 미래를 예지한 거잖아?"


 "어차피 시간은 흐르니까 전혀 모순되지 않아. 미래에 살고 있었던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서를 현재로 가지고 오면 예언서고, 과거에 썼던 예언서를 현재로 가져오면 역사서가 되지. 미래는 확률적이니까 내용은 계속 바뀌겠지만. 이런 간단한 개념정도는 알고 있도록 해."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소고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소고는 철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소고를 쿼쳐는 애써 무시하다가, 결국 한숨과 같이 책을 덮어 내려놓고는 양 손을 들어 설명을 했다.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하지만 그 사람은 사실상 시간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야. 시간은 가지를 치고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가지. 매 순간마다 미래는 확률적이야. 그 중 가장 높은 확률의 미래는 그것이 차차 현재로 다가옴에 따라 그 형태를 드러내. 그리고 이 책을 네가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것이 꿈이라서 그런 거야."


 소고는 이해했다. 자신이 책을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이곳에 쓰여있는 미래가 이루어질 확률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소고의 이해했다는 표정에 쿼쳐는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긴 옆머리를 한 번 쓸어내린 후 그는 말을 반복했다.


 "다시 말할게, 이것이 꿈이라서 그런 거야."


 소고는 이미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소고는 천천히, 적지 않은 충격을 아릿하게 받았다. 소고의 놀란 눈을 보던 쿼쳐는 이제서야 자신의 말이 닿았다고 생각하는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책을 들었다. 그러나 소고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소고는 자신을 보라는 듯 책을 덮어 강제로 빼앗고는 쿼쳐의 눈을 바라보았다. 책과 쿼쳐의 턱이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책이 움직임에 따라 쿼쳐의 고개도 돌아갔다. 그는 조금 화가 나 보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어느 때와 같이 차분했다.


 "뭐 하는 짓이지?"


 "제대로 설명해줘. 이게 꿈이라니?"


 쿼쳐는 어께를 으쓱였다. 명백한 뜻을 담은 행동이었다.


 "간단해. 네가 미래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미래가 너한테 다가오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시간의 마왕이고 이런 악몽 정도는 마음대로 좋은 꿈으로 바꿀 수 있지. 과거는 지나갔기 때문에 앞쪽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뒤쪽을 차지해. 상류에 흐르는 물은 미래, 하류에 흐르는 물은 과거. 알겠어?"


 소고는 더욱 심화된 혼란을 느꼈다. 오늘 아침에 느꼈던 혼란과는 차원이 달랐다. 쿼쳐의 말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고는 이제는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진짜 아픈 것은 아닐 것이다. 소고는 왼쪽 볼을 꼬집었다. 아릿하게 아팠다. 그러나 이 아프다는 생각도 착각이라면? 정말로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소고는 오늘 꿈에서나 그리던 완벽한 학교생활을 보냈다. 소고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쿼쳐는 별로 놀라지 않은 눈으로 소고의 뒷모습을 보았다.


 창 밖에는 예쁘게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어느새 밖에 나가서 신나게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 쪽 구석에서는 삽을 이용하여 다른 학생들에게 마구 눈을 뿌리는 선생님도 있었다. 언제 눈이 내렸지? 눈은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살포시 앉았다. 약한 나뭇가지는 곧 부러질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 겨울이었지? 소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타임마진이 소고를 덮치려 다가오고 있었다. 타임마진은 너무 커서 교실에서 소고가 있는 복도까지는 나오지 못했지만 주먹은 교실 문을 아슬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소고는 타임마진을 피해 도망 나왔다. 바깥은 따듯했다. 눈이 쌓여있었을 터인 바닥은 어느샌가 물이 고여 있었다. 머리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고는 이제는 정말로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앞뒤 사정도 생각하지도 않은 채, 소고는 무작정 자전거 거치대로 향했다. 자전거는 소고의 자전거 밖에 남지 않았다. 소고는 미끄러지는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의 생일을 입력했다.


 0428. 소고는 열렸을 거라 생각하고 자물쇠를 힘껏 옆으로 당겼다. 하지만 자물쇠는 고집스럽게도 반대쪽 고리를 물고는 열리지 않았다. 몇 번 다시 돌려본 소고는 자물쇠를 내팽개치고는 자전거를 집어 들었다. 소고는 젖은 자전거 위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가 튀어나옴에 따라 자물쇠가 뚝 소리를 내며 끊겼다. 고집스러웠던 자물쇠가 뿔뿔히 분해되어 개미가 되어서 하수구로 향했다. 소고는 그것을 보여 쌤통이라고 생각했다.


 소고는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밟았다. 눈싸움은 곧 물놀이가 되었고, 학생들은 소고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소고도 학생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쿠지고지 당에 가야해. 뭔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소고는 페달을 자신의 온 힘을 실어서 밟았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언덕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빠르게 돌아가는 자전거 페달과 빠르게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 돌이라도 걸려서 넘어지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소고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바퀴는 돌을 밟고 통렬하게 헛돌았다. 자전거를 놓쳐버리고 그대로 날아간 소고는 단단한 아스팔트 땅바닥에 그대로―


 ―"이제야 깰 마음이 들어, 나의 마왕?"


 소고는 방바닥에 그대로 떨어졌다. 게이츠는 졸다가 소고가 낸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소고가 잠 덜 깬 표정으로 게이츠를 바라보았다. 게이츠는 더 놀란 표정으로 화답했다.


 "일어났다."


 "일어났다?"


 소고가 떨어진 소리를 들은 것인지 츠쿠요미와 워즈가 황급히 달려왔다. 그 둘도 졸거나 자고 있었던 것인지 머리카락이 정갈하진 않았다. 소고는 그들을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상황을 설명해달라는 뜻을 담은 미소였다. 그런 소고의 속뜻을 가장 먼저 알아 챈 사람은 워즈였다. 워즈가 소고에게 다가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는 말했다.


 "기억 안 나? 나의 마왕, 너 괴인에게 당했었어. 상대에게 악몽을 꾸게 한다는 괴인한테."


 "그래? 그래도…… 악몽이 아니라 뭔가 기분 좋은 꿈을 꿨다는 기분이 드는데."


 소고는 햇빛이 비치는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꿈을 되짚어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불만스럽게 찌푸렸다. 분명히 좋은 꿈이었던 것 같은데, 혼란스럽긴 했어도. 그렇게 생각하던 소고는 갑작스럽게 어떠한 내용을 떠올렸다. 예견 없이 떠오른 사실 하나에 그만 소고 자신이 놀라버렸다. 소고의 입에서 나온 큰 소리에 츠쿠요미도 덩달아 놀랐다. 하지만 소고는 생각난 것이 휘발되지 않도록 빠르게 기억의 대상에게 향했다.


 "워즈, 내 꿈에 들어왔었어?"


 "무슨 소리지, 나의 마왕?"


 "네가 내 꿈에 들어와서 이것이 꿈이라고 말해준 게 아니야?"


 워즈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소고는 자신의 기억에 기반한 가설을 버렸다. 워즈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꿈의 휘발성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이미 의견을 얹었다. 꿈을 두세 번 반복해서 기억하지 않는 이상 아침에 꿨던 꿈을 점심까지 기억하고 있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하지만 꿈을 깬 바로 직후에도 기억나지 않는 꿈이 있을까? 꿈의 세계는 아직 연구가 미흡하여 무어라고 말하기 힘든 것만은 확실하다. 소고는 곧 자신이 꿨던 꿈을 잊어버리고 쥰이치로가 할 저녁에 대하여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다. 후세의 마왕은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이 꿈에서 그리던 우정을 이미 손에 넣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있었다. 그래, 꿈에서 갈망하지 않아도 말이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토키와 소고는 차후 시간의 마왕이 되어 전 세계를 지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키와 소고에게 꿈을 현실로 바꾸는 힘이 있다는 것은 상당수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가면라이더 제로원
진+이즈
주전자

Lehrt mich lernen, Iz.


 진은 자신이 어쩌다가 호로비가 입혀두었던 옷이 아닌, 생전 본 적 없는 옷을 입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의 눈이 크게 흔들릴 뿐이었다. 짙은 네이비 색으로 물들어 있는 마이와 조끼, 바지들을 바라보았다. 몸을 움직이는 데에 있어서는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빳빳한 재질의 느낌에 진은 긴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의 당황스러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멸망신뢰넷에 접속하려고 시도를 해보았지만, 접속은 커녕 아크와 연결이 끊긴 것만 같았다. 아무리 시도를 해보아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인간들을 절멸 시키라는 아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에게 일어난 변화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모듈을 쓰지 않은, 그러니까 인간으로 추정되는 존재들을 봐도 악의가 생기지 않았다. 멸망신뢰넷 소속인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진은 혼란스러움에 코어에서부터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일렁거렸다.

게다가 지금 진이 있는 곳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곳이었다. 초록색의 커다란 판이 앞에 있고, 그 앞에는 조금 커다랗고 딱딱한 상자가 있으며, 주변에는 똑같이 생긴 책상과 의자들이 많았다. 초록색 판의 한 쪽에는 뭐라고 적혀있었지만, 히라가나만을 읽을 수 있는 진에게는 전혀 읽히지 않았다. 읽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당황한 상태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자 인간, 그리고 휴머기어처럼 모듈을 쓰고 있는 존재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녕, 진!”

모듈을 쓰지 않은 여학생이 진의 뒷자리에 앉으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진은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를 보내며 의자에 앉더니 말을 건넸다.

“여긴 대체 어디야?”
“여기? 히덴 고등학교! 아이 참,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다고는 하지만 이제 학교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히덴.. 고등학교?”

진은 고등학교의 이름을 듣고 당황했다. 히덴이라면, 제로원이 히덴 인텔리전스라는 곳에 있다고 언젠가 호로비에서 들은 것 같았다. 근데 그런 곳에 내가 왜 있는 거지? 그냥 이름만 같은 건가? 진은 생각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듈을 쓰지 않은 남학생과 모듈을 쓴 남학생이 진의 앞에 앉으며 인사를 했다.

“요! 전학생-, 오늘은 늦지 않게 왔네?”
“누가 들으면 진이 매일 지각하는 줄 알겠어.”

모듈을 쓴 남학생의 말투는 다소 기계적이었지만, 제대로 대꾸하고 있었다.

“전학생? 그게 뭐지.. 저기, 휴머기어지? 너.”

진은 전학생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모듈을 쓴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긍정문이었다. 휴머기어가 인간과 함께 학교를 다닌다고? 진의 내부에 있는 컴퓨터에서 회로가 끊긴 것처럼 오작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진이 지금까지 호로비에게서 배운 것들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황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진은 그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아크의 의지, 그리고 호로비의 말에 따라 멸망신뢰넷의 동료를 만들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데이 브레이크 타운을 벗어나기 이전에 허공에 떠 있던 어떠한 빛을 발견했고, 그게 궁금해서 손을 뻗었다가 지금 이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 빛!”

진이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러자 같은 공간에 있던 친구들이 진을 쳐다보았다. 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 빛에 손을 뻗은 게 문제였구나! 진은 깨달았다. 그럼 돌아가려면 그 빛에 다시 한 번 손을 뻗으면 되겠네! 하고 진은 생각했다. 문제는 그 빛을 어디서 찾느냐였다.

그래서 진은 다시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일단 이곳에서 적응을 해보자고 다짐했다.

 †††††††

 그렇게 한 달이 지나도 진은 다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 채였다. 아직 감도 못 잡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싶은 그때, 반의 문이 열리고 선생님과 익숙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에 맞춰 모듈을 쓰고 있는 여학생이 일어났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하세요.”
“그래. 전학생이 한 명 더 왔다. 전학생이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전학생이 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기왕 온 거 사이 좋게 지내라. 전학생, 자기소개 간단하게 해라.”
“히덴 인텔리전스의 사장실 비서, 이즈라고 합니다.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즈가 꾸벅 인사를 하자, 반에 있던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반겼다. 물론 개중에는 떨떠름한 표정의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진이다. 진은 이즈가 이곳에 온 것도 당황스러웠다. 쟤가 왜 여기에.. 진은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어디보자.. 빈 자리가.. 아, 그래. 저기 보이는 저 녀석 보이지? 쟤 옆자리에 앉으면 될 거다.”
“에?”
“그럼 조회는 이 정도로 하고, 다들 수업 잘 들어라.”

이즈는 시스템에 입력된 움직임으로 진의 옆자리로 갔다. 진은 그런 이즈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이즈가 진의 옆자리에 앉자, 진은 이즈에게 말을 걸려고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여기...”
“진! 오늘 점심시간에 반 대항 축구 경기 있는 거 알지?”
“아, 응.”
“늦게 오면 안 돼! 우리 반 에이스는 너잖아! 믿고 있다고-!”
“응.”

진의 말을 끊어버린 친구에 진은 속으로 타이밍이 안 좋다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이즈는 진에게 말을 꺼냈다.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응, 인간들과 지내는 것도 꽤... 이게 아니라,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어떻게 왔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떠 있는 빛에 손을 뻗었더니 이곳으로 오게 됐습니다.”

진은 자신과 동일한 방법으로 오게 되었다는 이즈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어쩌면, 이즈와 함께 지내다 보면 돌아갈 방법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즈는 위성 제아와의 연결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모듈에 손을 얹었다.

“제아.”
“소용 없을 걸. 나도 여기에 오니까 아크와의 연결이 끊겨서 멸망신뢰넷에 접속이 안 되니까.”
“진, 당신은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됐나요.”
“음.. 한 달 정도 된 것 같은데?”
“그럼 그 사이에 돌아갈 방법도 찾아두셨겠네요.”
“그게...”

진은 아직도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걸 말하기 껄끄러운 느낌이 들어 입을 닫았다. 어쩐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진의 대답을 기다리던 이즈가 입을 다시금 열었다.

“진?”
“아직.. 못 찾았어.”

진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어쩐지 볼의 부품들에 열이 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말하기 싫었는데.. 진은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그러자 이즈는 조금 놀란 눈으로 진을 쳐다보았다. 한 달 동안 있으면서 돌아가는 방법을 못 찾았다니, 단서도 못 찾은 걸까 싶어 이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단서도 못 찾으셨나요?”

진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이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찾아보면 되겠네요. 당신도 여기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너, 여기에 오기 전에 공중에 떠 있는 빛에 손을 뻗었다고 했지?”
“네.”
“나도 데이 브레이크 타운에서 나와 친구를 만들러 가다가 공중에 떠 있는 빛에 손을 뻗었다가 여기로 오게 된 거야.”
“그럼, 우선 그 빛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겠군요.”
“그렇지만, 빛에 대한 단서가 하나도 없어!”

진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다. 하지만 언제나 호로비와 함께 친구를 만들러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데이 브레이크 타운에서의 생활이 그리웠다. 빛에 대한 단서가 없다는 말을 하고 나니 진은 어딘가 기운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즈는 그런 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빠르게 생각을 해보았다. 진과 이즈가 이곳에 오게 된 시기는 한 달 정도 차이가 났다. 그렇다는 건 빛이 한 달 간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나타나는 장소였다. 한 달 동안 혼자서 찾기는 무리가 있다고 이즈는 판단했다.

“진, 저와 한 달 동안 함께 빛을 찾아주세요.”
“내가 너랑? 어째서? 우리는 적인데.”
“아크와 연결이 끊긴 당신, 그리고 제아와 연결이 끊긴 저는 적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같이 낯선 곳에 떨어진 휴머기어로서 협력을 해서 돌아가자는 제안일 뿐입니다. 돌아가서까지 협력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진, 당신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단서 하나도 제대로 찾지 못했으니 이 제안이 나쁘기만 한 제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망설이는 거죠? 목표가 같은 지금이야말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과 제가 협력을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

진도 알고 있었다. 이즈와 협력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협력을 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멸망신뢰넷 소속인 자신이 이즈와 협력을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집을 피웠다.

이즈는 그런 진이 어딘가 못마땅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소속을 따져가면서 판단을 내리려고 하는 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진과 협력을 해야 하니까, 대답을 기다리면서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진이 입을 열었다.

“알겠어. 협력... 할게. 협력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지. 난 호로비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이즈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응.”

진은 손을 내밀었다. 진과 이즈는 그렇게 협력 관계가 되었다.

 †††††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응?”

시간이 지나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 처음에는 협력하는 사이가 되었다고는 해도 말 한마디 섞지 않던 진과 이즈는 어느덧 서로에게 질문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진이 이즈에게 질문 하는 횟수가 더 많았지만, 이즈가 진에게도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저와 당신, 그리고 모듈을 끼신 휴머기어 분들은 식사가 필요하지 않은데 점심시간에 무엇을 하나요.”
“다른 녀석들은 충전을 하러 가는 것 같던데. 나도 잘은 몰라.”
“그럼, 진은 무엇을 하나요?”
“나?”

이즈의 돌발적인 질문에 진은 당황했다. 뭘 하더라.. 고민을 하던 진은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옥상에 가서 시간을 때워. 거기에 있으면 데이 브레이크 타운으로 돌아간 것 같거든.”
“그렇습니까.”

진이 어딘가 기운이 빠진 것을 이즈는 눈치를 챘지만 위로의 말은 건네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끌벅적하게 점심을 먹는 아이들 사이에서 진과 이즈의 사이에만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이즈는 입을 열었다.

“옥상, 저도 가보고 싶습니다. 진, 저와 옥상으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 거길 네가 왜...”
“그곳으로 가면 돌아갈 방법의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그랬으면 내가 발견했겠지!”
“그래도 만약, 이라는 것이 있으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

진은 고민에 빠졌다. 옥상은 진이 그리운 멸망신뢰넷의 아지트이자, 자신의 집을 떠올리며 쉬어가는 곳이었다. 그만큼 진에게는 소중했다. 그래서 고민했다. 이즈에게 옥상을 보여줘야 할지, 말지.

이즈는 그런 진을 눈치챘다. 가고는 싶어 하는데, 일부러 안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유도를 했던 것이다. 단서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이즈는 진에게 나름의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알겠어. 가자.”

진이 일어나면서 이즈에게 말을 걸자, 이즈도 진을 따라서 일어났다. 그렇게 둘은 옥상으로 향했다.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학교에서 알고 있던 존재가 서로 뿐이기 때문일까, 둘은 아무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묘한 유대감이 보였다.

진도 이즈도 별 말을 나누지 않은 상태로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갔다. 진은 언제나 가는 옥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 이즈의 말대로 어쩌면 옥상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진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어느덧 도착한 철문 앞. 진은 이즈를 슬며시 보더니, 문을 열었다. 무거운 철문이 오래되어 녹슨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 틈을 통해 눈부신 빛이 여과 없이 들어왔다. 이즈와 진은 그 빛을 똑바로 마주하며 옥상으로 나갔다. 교실에 있는 것과 똑같은 책상 그리고 의자들이 있었고, 체육대회에 쓰인 것 같은 현수막 등이 그늘 한 점 없는 옥상에 있었다.

“여기야, 내가 점심시간마다 오는 곳.”

진은 또 다시 볼의 부품들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전에 깔아둔 돗자리 위에 누웠다.

“나는 언제나 여기에 와서 호로비, 그리고 암살쨩이랑 같이 지내던 데이 브레이크 타운을 떠올렸어. 이렇게 누워있으면, 데이 브레이크 타운이 눈 앞에서 보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좋아.”

내가 왜 이런 걸 쟤한테 말하고 있는 거지?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진은 계속해서 말했다.

“가끔 바람을 타고 꽃잎이 날아오는 경우도 있어. 엄청나지? 학교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그런가...? 뭐, 너도 누워 봐.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사장실이 보일 수도 있잖아.”
“이즈는 그런 거 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게 정말 보인다면 좋겠네요.”
“해보면 아는 거 아닌가..”

진의 말에 단서를 찾아 옥상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이즈는 조용히 옆으로 갔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 진의 눈가로 쪽지 하나가 날아왔다. 정확히는 바람에 실려서 왔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뭐야 이게!”

진은 벌떡 일어나면서 눈가에 붙어버린 종이를 떼어내고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언어지? 진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 읽을 수가 없었다. 한자?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즈 -, 이거 뭐라고 적혀있는 거야?”

진은 이즈에게 쪽지를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이즈는 쪽지를 받아서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이것은.. 독일어로 추정이 됩니다.”
“독일어?”
“Zea und Ark zeigen, dass sie zusammenarbeiten können, ohne zu kämpfen. Nachdem du hier zusammen studiert hast, sag mir, dass der Unterricht heute vorbei ist. 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데?”
“제아와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서, 제대로 된 번역을 해드릴 수 없지만 대략, 제아 그리고 아크가 싸우지 않고 협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 같이 공부를 한 다음, 여기서 ‘수업은 오늘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뭐? 공부? 나 공부는 싫은데...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진, 당신 수업 시간에 계속 눈을 감고 있던데요.”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런 거지!”
“...”

순간 진과 이즈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즈는 진의 큰 목소리에 놀란 듯한 눈으로 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진은 벌떡 일어나더니, 축구 경기를 하러 가야겠다며 옥상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진.”

이즈의 목소리가 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진은 호로비에게서 배운 게 없다는 것을 이즈에게 티 내는 것이 싫었다. 호로비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말하고 싶지 않은 껄끄러운 느낌들이 들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즈의 목소리에 다시 묶인 지금, 진은 이즈를 쳐다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제가 당신의 공부를 돕겠습니다.”
“뭐? 애초에 그걸 내가 왜 해야 하는데?”
“당신과 저는 원래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협력을 하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저희를 이곳으로 오게 한 분께서는 그런 모습을 원했던 것이겠죠. 이 쪽지에도 적혀있던 것처럼 협력해, 공부를 하고 이곳에서 외치면 돌아갈 수 있다고 이즈는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협력관계인 이상, 저는 당신의 공부를 돕고 당신은 지식을 열심히 습득하면 되는 거죠.”
“그걸 언제까지 얼마나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모르잖아!”
“아뇨. 당신과 제가 이곳에 오는 데에는 한 달이라는 기간이 존재했죠. 이를 토대로 생각했을 때, 한 달에 한 번씩 오갈 수 있는 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목표치에 대한 단서는 없네요.. 목표는 단서를 찾으면 다시 정하는 걸로 하죠.”
“... 알겠어.”
“그럼, 오늘 학교의 일정이 모두 마친 다음에 반에서 같이 공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진은 이즈의 말을 마지막으로 옥상에서 빠져나갔다. 이즈는 그런 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거운 철문 뒤로 진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그리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루토 사장님, 저는 잘 하고 있는 걸까요.’

진은 계단을 계속해서 내려갔다. 이즈가 모르는 게 많다고 놀릴 휴머기어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진은 자신의 적의 편에 있는 이즈에게 호로비가 나쁘게 보이는 게 싫었다. 진은 잠시 멈춰서서 생각을 했다.

‘호로비는 왜 나한테 알려준 게 인류는 멸망 시켜야 하는 존재라는 것 뿐인 걸까. 내가 호로비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무서웠던 걸까? 호로비, 내가 공부를 해서 가면 기뻐 해줄 거야?’

 †††

 어느덧 시간은 흘러, 내일이면 진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두 달째 되는 날이자 이즈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창문 너머에서는 육상부 친구들의 구호 소리, 야구부 친구들의 배트와 공이 맞닿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미 해는 산 뒤로 숨으려고 하고 있었다.

교실 안도 하늘색과 함께 붉어졌다. 그 안에서 진과 이즈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진은 어느덧 기본적인 한자는 물론 국어 교과서도 조금은 더듬거리지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영어도 조금은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사각사각, 종이에 연필로 흔적을 남기는 소리.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는 소리. 두 소리만이 교실 안을 가득 채웠다. 내일은 진과 이즈가 보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시험이 있는 날이다. 시험을 마무리 하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진의 얼굴로 쪽지가 날아온 이후로는 이렇다 할 단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시험을 보고, 쪽지에 적힌 문구를 같이 외칠 수 있을 정도를 목표로 설정했다.

“이즈-.”
“네.”
“우리 내일이면 돌아가네!”
“.. 그렇네요. 한 달이 지나갔으니까요.”

이제는 ‘우리’라고 말 할 수 있는 사이가 된 이즈와 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일, 드디어 내일이다. 하지만 이즈와 진은 어쩐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을 했다. 아크와 제아가 싸우지 않아도 되는 이곳에서는 평화로웠고, 즐겁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으니까.

“진, 문제는 다 푸셨나요?”
“응! 자. 분명 이번에는 다 맞았을 걸!”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즈는 진이 푼 수학 문제들을 채점했다. 진은 그런 이즈를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언젠가.. 나와 호로비가 인간들과 싸우지 않게 된다면. 이즈랑 다시 협력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호로비-, 어쩌면 인간들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생명체일지도 몰라. 인간들 그리고 휴머기어들이 서로 잘 어울려서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아크와 연결되지만 않았더라면…・・・.’
“진.”
“으, 응!”
“만점, 이네요. 잘 하셨어요.”
“정말?! 아하하!”
“내일 호로비에게 자랑할 게 생겼군요.”

만점이라는 사실에 밝게 웃던 진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내일 돌아간다, 호로비에게 자랑을 해도 야단맞을 것 같다. 진은 걱정이 앞섰다. 이즈는 그런 진을 보며 어떠한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이즈의 시스템에 ‘남을 달래는 일을 하는 방법’ 따위는 없었으니까.

“저기, 이즈-...”
“네.”
“나.. 돌아가기 싫어졌어.”
“호로비에게 돌아가고 싶으셨던 거 아닌가요.”
“맞아. 근데.. 여기서 지내고 보니까, 인간들이 그렇게 나쁜 생명체이기만 한 것 같지는 않아서. 계속해서 싸우다 보면,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을 계속해서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싸우고 싶지도 않아졌어. 호로비가 싫은 건 절대 아냐! 그렇지만... 나도, 칭찬이 받고 싶어.”

진이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말하자, 이즈가 진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호로비도 분명 칭찬할 거예요. 아루토 사장님께서도 제가 무언가를 해내면 고맙다고 하시면서 잘했다고 해주시는 걸요. 진, 당신이 돌아가서도 계속해서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다면 언젠가 호로비도 당신의 마음을 알아줄 거예요. 이즈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진이 기쁜 듯이 웃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진과 이즈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멸망신뢰넷의 휴머기어인 진과 히덴 인텔리전스의 휴머기어인 이즈. 이 둘 사이에서는 ‘우정’이라고 칭할만한 유대가 생겨난 것이다.

각자에게 영향을 주던 인공위성 시스템들과의 연결이 끊기니,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진은, 호로비가 언제쯤 이런 걸 경험해보기를 바라고 있다. 이즈도 언젠가 멸망신뢰넷이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은 여과 없이 흘러만 갔다.

 †

 “오늘 시험 다들 수고 많았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서 내일 있는 시험 준비를 미리미리 하도록.”
“차렷! 선생님께 경례!”
“감사합니다!”

반 아이들은 빠르게 준비를 하고 반을 나섰다. 진과 이즈도 가방을 챙겼다. 어쩐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즈가 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진. 드디어 오늘이네요.”
“... 응.”
“옥상으로 가면 그 빛이 있겠죠?”
“그렇겠지?”

진과 이즈는 발걸음을 옮겨, 그들이 처음으로 동료가 된 이후로 단서를 찾아냈던 ‘그 장소’를 향해 갔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리다. 부품들에 기름칠이 부족했던 걸까? 무거운 옥상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틈 사이의 하얀 빛은 점차 커지더니 진과 이즈를 덮쳤다.

그렇게 나온 옥상. 처음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달라진 건 이즈와 진 뿐이었다. 진은 주문을 외치기 전에 한 번 여기에 누워보자고 이즈에게 제안했다. 이즈는 그러자고 했고, 진이 깔아두었던 돗자리 위에 둘은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에 수놓은 듯 구름들이 있었다. 이제 같이 볼 수 없는 풍경. 그러다가 진은 멸망신뢰넷의 아지트가 하늘에서 보였고, 이즈는 히덴 인텔리전스의 사장실이 보였다. 그들이 돌아가야 하는 장소가 하늘에서 보였다.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꺼낼 수 없었다. 그저 하늘을 올려다 보며 돌아가야 하는 곳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이즈가 입을 열었다.

“진, 이제는 가야 할 때가 왔어요.”
“응...”

이즈와 진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쪽지를 봤던 그 자리에서 섰다. 그리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적이라는 생각에 거리를 두었지만, 지난 한 달간 함께 공부를 하면서 즐겁게 보냈었다. 이즈가 미소를 지어보이자, 진은 활짝 웃었다.

그 웃음들을 끝으로 둘은 주문을 외쳤다.

“dass der Unterricht heute vorbei ist! (수업은 오늘 끝났습니다!)”

그러자 빛의 알갱이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환하게 빛나는 빛의 향해 손을 뻗기 전, 진과 이즈는 서로를 바라봤다.

“당신과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나도. 언젠가 또 같이 공부하자!”
“네. 조심히 가세요.”
“이즈도 조심히 가!”

진과 이즈는 동시에 빛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 빛은 그들을 감쌌다. 그렇게 그들의 짧지만 길었던 학교 생활이 끝났다. 그들의 협력관계도 끝이 났다.

“이즈, 이즈!”
“아루토 사장님.”
“아, 이즈! 다행이야! 고장난 줄 알고 놀랐다고-.”
“.. 행동 시스템을 확인.”

이즈는 아루토쟈 나이토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다리를 움직이고는 말했다.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아루토 사장님.”
“응?”
“휴머기어도 꿈, 이라는 것을 꾸는 걸까요. 제가 공부를 하는 듯한 꿈을 본 것 같습니다.”
“에?! 이즈, 꿈도 꾸는 거야?”
“아, 아닙니다. 오늘의 일과를 시작하시죠.”

이즈는 오늘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업무 수행할 것들을 챙겨왔다. 한편, 멸망신뢰넷 아지트에서는 진이 충전을 하며 호로비에게 말했다.

“있지, 호로비-.”
“뭐냐.”
“나, 공부라는 걸 했던 것 같아. 막 만점도 받았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런 소리 할 시간에 친구나 만들고 와라.”
“친구? 아하하! 신난다! 호로비도 가는 거지?”
“어.”

진은 호로비와 함께 다른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렇게 친구를 만들러 갔다. 그들의 기억은 메모리에서 삭제되었지만, 어쩌면 그들의 코어 깊은 곳에는 저장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유대감이. 다만, 그걸 알아채기는 어렵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