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교시 기타 특촬 시간!



‌GARO 마계의 꽃
‌크로우X사메지마 라이가
‌슭곰

‌< 선택할 수 있었던 길 >
─크로우x사에지마 라이가


 “그래서, 사에지마 군은 어디서 왔어?”
“으음… 그게……”


사에지마 라이가는 만면에 상냥하지만, 곤란한 듯한 미소를 그린 채 대답을 얼버무리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저 사람은, 당신들을 지키기 위해 밤마다 사람의 악의를 먹고 자라는 괴물과 싸우고 있다고 하면 믿을까. 책상 두 줄 만큼 떨어져 있는 위치에서 크로우는 담담히 생각했다. 저 표정은 분명히 난처해하고 있는 얼굴이다. 당장이라도 그를 도우러 가고 싶었지만.


“너 크로우라고 했지? 이름이 특이하네.”


자신 역시도 학생들에게 잡혀있었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이야기는 바로 어제로부터 시작된다.


 한동안 잠잠하던 번견소의 지령이 한때의 평화를 깨트리며 사에지마 라이가와 크로우를 찾아왔다. 신관에게 찾아가 보니, 언제나 고고하게 앉아있는 그는 한결같은 목소리로 지령의 내용을 고했다.


“어린 인간들이 차례차례 사라지고 있습니다.”
“호라입니까?”

“정확히 어떤 호라인지는 번견소에서도 아직 특정짓지 못했습니다. 다만… 호라가 인간을 먹고 남은 찌꺼기 정도만 발견했을 뿐이지요.”


찌꺼기. 라이가의 눈썹이 약하게 찌푸려졌다. 번견소의 신관들은 하나같이 어디서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무기질적인 말투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면 될는지요.”


대신 크로우가 나서 질문을 잇자, 신관은 한 장소의 모습을 허공에 수놓으며 대답했다.


“호라의 흔적이 발견된 곳입니다. 이곳에서 호라의 정체를 판명하고, 봉인하세요.”


여기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체를 숨기는 것에 유별나게 특출한 호라도 있는 법이다. 그런 호라를 찾아 봉인하는 것도 지금까지 숱하게 해온 일이다. 다만, 그 장소라는 것이.


“…학교?”


바로 학교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다시 지금.


라이가와 크로우는 호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던 고등학교에 나란히 편입하게 되었다. 그것도 같은 반으로. 이 상황의 이유는 간단하다. 팔랑팔랑 나부끼는 흰 코트와 검은 코트 조합은 누가 보아도 눈에 뜨이니, 학교에서 돌아다니기에 가장 적합한 신분으로 잠입할 것. 그것이 번견소의 명령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꼴도 모르면서 이상한 부분에서 상식적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영계에서 까라면 까야지.


난생처음 일반인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고 있는 두 기사를 구한 것은 다행히도 학교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였다.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학생들은 저마다 쉬는 시간이 끝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제각각 자리로 돌아갔다. 간신히 풀려난 라이가는, 문득 저를 바라보는 크로우와 눈이 마주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한결같은 사람. 결국, 크로우도 어쩔 수 없이 따라서 잠깐의 미소를 내비친다.


수업 시간은 꽤나 신선했다. 기본적인 지식은 각자 몸담은 곳-이를테면 라이가는 집에서 곤자를 통해-에서 배운 바가 있지만, 그보다는 더 중요한 사명을 짊어진 것이 마계기사다. 당연히 머릿속 대부분은 마계와 호라에 대한 지식이 채우고 있다. 그러니 일반 학생이 듣는 수업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단지 그들의 반응은 상반적이어서. 독서가 취미인 라이가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수업을 들으며 교과서의 페이지를 넘겨 읽고 있었고, 크로우는 그저 책을 펼친 채 앞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의 말을 대강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에겐 새로운 탐구의 시간, 누군가에겐 지루한 명상의 시간이었던 수업이 끝을 알렸다. 아까 두 기사를 구했던 종소리는 이번엔 그들을 괴롭히게 될 것이다. 한번 겪은 크로우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재빨리 일어나 라이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크로우?”
“가시죠.”


똑 떨어진 듯 나타난
 편입생 둘에게 다가오는 학생들 사이를 뚫고 크로우는 폭풍처럼 라이가를 붙들고 뛰쳐나갔다.

 높은 곳은 정찰하기가 편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와 보이니 그의 눈은 빠르게 이상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크로우는 이 학교에 와서도, 가장 높은 곳을 제일 먼저 찾았다. 빠르게 학생들을 제치고 옥상으로 대피한 크로우와 라이가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하아……”
“인기가 많으시군요, 라이가 씨.”
“그거… 놀리는 거지, 크로우.”
“그럴 리가요.”


눈이 마주쳤다. 똑같이 하얀 셔츠에 넥타이, 조끼를 걸치고, 같은 밤색 바지를 입고 있다. 늘 검은색 일색이었던 크로우의 모습을 생각하면 확실히 지금 이 모습은 낯설고 새롭다. 크로우, 흰색도 의외로 잘 어울리는걸.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봐야 반응은 뻔하다. 저는 불편합니다, 라거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환영기사에겐 어울리지 않습니다, 라거나.


일이나 하자. 눈에 뜨일까 봐 작은 주머니에 담아온 자르바를 꺼냈다.


「푸하. 답답해 죽는 줄 알았잖아, 라이가.」

“미안, 자르바. 고생했어. 그래서, 어떤 것 같아?”
「흐리지만, 확실히 기척은 남아있어.」


자르바 대신 대답한 것은 그새 크로우가 품에서 꺼낸 오르바였다.


「꼬마 아가씨 말대로. 희미해서 정확히 위치를 알아내긴 어렵지만… 밤이 되면 분명히 꼬리를 드러낼 거야. 그건 확실하다고, 라이가.」
“그럼 역시 밤까지 기다려야겠네.”


난간에 양 팔꿈치를 기대며 라이가는 말했다. 꼬마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날카로운 오르바의 외침을 끝으로 마도륜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정적을 대신 메꾸는 것은 옥상 아래, 운동장과 활짝 열린 창문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쉬는 시간을 틈타 뛰쳐나와 운동장을 누비며 공을 차고 노는 학생이 여럿, 창문을 지나가며 어제 본 TV 프로그램의 이야기를 하는 학생이 또 두어 명.


“라이가 씨는 기사 학교에 다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문득 크로우가 물었다. 크로우의 질문에 라이가는 가만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기사 학교는 다닌 적이 없다. 그러나, 어쩌면. 평범한 학교엔 다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날이 없었더라면.


어머니가 시공의 공간에 빨려 들어가고, 든든했던 아버지가 사라진 그 날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그런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 행복해 보여.”


그렇게 말하는 라이가의 옆얼굴을 보며 크로우는, 이유도 알지 못하고 덜컥 겁이 났다.


 이곳은 평화롭다. 평화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다. 그 말은 정말일까. 누구보다 평화를 원하는 당신인데. 당신이 걸어온 길을 후회하진 않을까……


그리고 그때.


 “있잖아… 이거, 정말 소원을 들어줄까?”
“그렇다니까. 내 말만 믿어…… 그걸 하고 손을 맞잡아 소원을 말하면, 다음날 정말 이루어진대.”


 조용히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잡혔다. 학생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그들에게 다시 기사의 감각이 돌아왔다. 그렇다. 이 멀지 않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왔다는 것을 되새긴다.


 *


 “그럼 사에지마! 스즈무라! 내일 보자!”
“응, 내일 봐.”


이렇게 친근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 있었던가. 모두 사에지마 라는 성을 알자마자 당황하거나, 경의를 표하기에 바빴다. 그들의 세계에서 사에지마 가문은 따지자면 명문 중의 명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라이가는 하교 시간이 되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앞자리의 남학생에게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내일이면 우리는 사라졌을 테고, 너희들도 우릴 잊겠지만. 아마도 라이가는 이 인사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저는 왜 하필이면 ‘스즈무라 크로우’가 된 겁니까.”


차례차례 학생들이 하교하면서 교실이 군데군데 비워졌다. 그 사이에 슬그머니 라이가의 곁에 다가온 크로우가 꾹 참아왔던 불만을 토로한다.


“그야 크로우가 본명을 말해주지 않으니까. 스승님의 이름을 빌릴 수밖에.”


불만있으면 이름 알려주면 되잖아? 이름. 빤히 바라보는 눈길에 결국 크로우는 본전도 못 찾고 라이가의 시선을 피했다.


“…아까 대화를 나누던 학생들은 모두 찾아냈습니다. 다행히 같은 층에 있는 교실에 소속된 학생들이더군요.”


다시 일로 돌아가 얘기를 꺼내자, 라이가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상황은?”
“소원을……들어주는 부적이 있다는군요.”


한창 감성적일 나이의 학생이 홀리지 않을 수가 없는 소재였다. 물론 흔하기도 하고.


“해 질 무렵에 교문 앞에 나타나는 상인이 판다는군요.”
“해 질 무렵이라…”
「뭔가 냄새가 나네.」


어느새 제 자리를 되찾은 자르바가 라이가의 손가락 위에서 하관을 덜걱거리며 말했다. 마침 해가 질 무렵이다. 눈을 마주친 라이가와 크로우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겨 하교하는 학생들의 무리에 섞였다.


 크로우가 물어온 이야기처럼 교문과 얼마간 떨어진 벽에 동상과 같이 앉아있는 인영이 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 앞에는 낮은 탁자에 오색 구슬과 챰이 달린 팔찌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 마침 그 앞에 팔찌를 사고 나눠 가지며 학생들이 떠나는 것에 맞춰 라이가와 크로우가 다가갔다. 상인은 여전히 미동이 없다.


라이가가 손을 뻗어 팔찌 하나를 집어 들었다. 꿰매진 구슬이 요요하게 빛났다. 아래에 달린 챰은……


“소원이 있나?”


동상처럼 앉아있던 상인이 입을 열었다.


“글쎄.”


크로우의 눈길이 빠르게 라이가가 들고 있는 팔찌를 훑었다. 그 끝에 달린 챰에 그려져 있는 것은 분명, 분명히 마계어였다.


“내게는 보인다. 너의 소원이.”


숨만 쉬는 동상처럼 앉아있던 상인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끅끅끅,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앞에서 사라진 부모님을 되찾고 싶다. 그랬다면 내게 다른 길이 있었을 텐데.”


라이가의 숨이 멈춘 순간, 챰에 그려진 마계어가 붉게 빛난다.


“라이가 씨!”


민첩하게 움직인 크로우가 라이가의 손을 쳐내며 그를 뒤로 끌어당겼다. 라이가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팔찌가 펑! 제법 큰 소리와 함께 터졌다. 뿌연 연기가 가셨을 즈음엔 그 상인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춘 자리에서는. 가엾은 황금기사-- 비웃는 목소리만이 잔재처럼 맴돌았다.


 호라였다. 찰나의 순간 사라진 호라의 기척을 잡아낸 것은 자르바와 오르바였다. 이제 부 활동도 마친 학생들도 모두 귀가할 즈음이 된 어두운 학교 안. 마계검을 빼 들고 마찬가지로 어둠에 잠식된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뚜벅뚜벅 울렸다. 걸음 하나하나마다 신중했다. 어디지, 어디야. 순간의 실수로 호라를 놓친 라이가는 제 입술을 깨물며 주변의 기척을 날카롭게 살폈다. 그 때 였다.


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빈 복도를 채운다. 두 사람의 걸음이 빠르게 비명을 쫓았다. 비명의 근원지는 낮까지 그들이 학생들에게 어색하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그 무리에 섞여 수업을 들었던, 그들의 교실이었다.


뒷문을 벌컥 열자 모여앉은 4명의 여학생이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둥글게 모여 앉아있었다. 마치 무언가로 인해 붙어버린 듯이 손을 떼지 못하고 팔을 이리저리 뒤틀던 학생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눈앞에 나타난 상인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저 팔찌를 매개체로 옮겨 다니던 놈이었군. 그래서 기척이 잡히지 않은 거야.」


빠르게 이어지는 자르바의 말을 뒤로하고 라이가는 빠르게 가로검을 뽑아 들어 그사이를 가르며 가로막았다.


“다시 만났네. 호라 씨.”
“부모님을 찾고 싶어 왔나?”
“……어디까지 동네방네 소문이 났는지, 참.”


라이가의 동요는 한 번뿐이다. 다시 한번 가로검을 제대로 고쳐 쥐는 사이, 크로우가 빠르게 검을 휘둘러 매개체인 팔찌만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호라의 주술이 풀린 학생들은 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몸만을 챙겨 정신없이 교실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크로우 역시 라이가의 옆에 서서 경계하듯 검을 치켜세웠다.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호라다. 빠르게 끝내지 않으면. 크로우는 아까부터 라이가를 쿡쿡 찌르는 말을 하는 호라가 맘에 들지 않았다.


“뭐가 불만인지. 어린 인간은 다루기가 쉬워서 좋아. 볼품없는 작은 소원 하나를 들어주면 금방 환희에 젖거든. 하지만……그래. 환희에 젖은 어린 영혼만큼 별미는 또 없지.”
“입 다물어, 호라!”


라이가의 검이 쇄도했다. 호라는 가볍게 몸을 틀어 검을 피한다.


“크크크큭. 재밌는 꼴을 하고 있군, 황금기사. 평범한 학교생활은 어떻던가? 네 아비가 멀쩡했다면 너 또한 내 먹잇감이 되었을 것을!”


자신만만한 호라는 여전히 입을 놀리기 바빴다. 평범한 학교생활. 말할 것도 없이 둘 다 처음이었다. 그들은 다른 마계기사를 지망하는 어린이들이 가는 기사 학교조차 가지 않았다. 라이가는 아버지의 맹우인 스즈무라 레이와 야마가타나 츠바사에게 주로 검을 배웠고, 크로우 역시 어릴 적부터 몸담은 그림자 속에서 대사로부터 사사받았다. 그들은 어린 날, 또래들과 보내온 추억이 없다. 그래서 원치 않았던 오늘이 더욱 특별했다. 그래서, 자신들은 선택하지 못하는 내일을 살아갈 학생들을 노린 호라를 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그 틈을 탄 호라는 재빨리 등으로부터 날개를 활짝 폈다.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도망가려는 셈이다. 다만, 호라가 알아내지 못했던 것은.


“이쪽에도 날개가 있다는 건 모르나 보군.”


나란히 선 두 기사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빛이 어둠을 가르며 두 수호자에게 내리쬔다.


까마귀가 날았다. 갑옷의 소환시간이 저만치 날아갔지만, 이 눈앞에 건방진 호라를 단죄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환영기사는 은빛 잔상을 남기며 날아 호라의 비행을 방해해 떨궜다. 추락하는 호라를 반기는 것은 밤을 밝힐 정도로 빛나는 황금기사. 가로검은 그대로 호라를 봉인한다.


“너에게 소원을 물을 권리는 없어.”


봉인된 호라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밝은 빛을 내며 갑옷은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사라지고, 크로우 역시 날갯짓을 하며 땅에 착지해 갑옷을 돌려보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운동장에 덩그러니 두 사람만 서 있다. 이 어두운 학교에서 이제 학생이 사라지는 일은 더는 없을 것이다.


“자, 그럼 이제…… 하교할 시간이네.”
“……그렇군요.”


라이가는 잠시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학교 건물을 바라봤다. 크로우는 그 옆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자신도, 라이가도 아직 교복을 입은 채다.


“미련이 남으십니까?”
“응?”
“당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길 말입니다.”


그러면서 크로우는 라이가가 바라보던 학교 건물을 바라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자신과는 달리 라이가는 평범한 사람의 길을 걸을지, 수호자의 길을 걸을지 선택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이곳에 당신의 미래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라이가 씨.”
“확실히 그렇지만…… 이미 지난 길을 되돌아볼 필요는 없지. 나는 역시 수호자로 사는 것을 선택했을 거야.”


아니면, 크로우는 내가 평범하길 바라? 낮에 그랬던 것처럼, 반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쉬는 시간엔 뛰쳐나가 공을 차고, 수업시간에 가끔 졸기도 하는, 그런 일상을 보내는.


“……그렇네요. 당신이 이 밝은 길을 선택했더라면, 내가 당신을 만나 당신의 그림자가 되는 일은 없었겠지요.”


나는 왜 겁이 났을까. 크로우는 학교 건물을 등지고 돌아섰다. 교복 차림이 낯선 라이가가 마주한다.


“하지만 역시 저는 당신의 그림자로 사는 것이 낫습니다. 아니, 더 좋습니다.”
“그건 내가 가로라서?”
“아니요. 사에지마 라이가, 당신이라서.”


할 말을 잃은 듯 서 있는 라이가를 향해 크로우는 웃어 보이며, 언제나 그가 해주었던 말을 했다.


 “돌아가죠, 라이가 씨.”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두 학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흰 코트와 검은 코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


 나른한 햇살이 넓은 창문을 지나 복도 바닥에 내리쬐는 한가로운 오후. 일이 없는 날이면 사에지마 라이가는 푹신한 쇼파에 앉아 집에 쌓여있는 오래된 고서를 읽는 습관이 있었다. 마유리와 곤자가 저택의 정원에서 꽃을 돌보는 모습을 지나쳐온 크로우가 거실에 들어서면, 아니나 다를까 라이가는 책에 푹 빠져있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본다.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검은 머리가 햇빛에 물들어 연한 금빛으로 서서히 빛났다. 다른 기사들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하고 정갈한 취미다. 수련, 아니면 독서. 일이 없음에도 크로우가 당연한 듯 뇌명관에 찾아오는 것 또한, 어느덧 본인도 모르게 습관으로 자리잡았는 줄도 모르고. 페이지가 팔랑 넘어갔다. 여기서 한 발자국만 다가가면 기척에 예민한 라이가는 분명 자신이 찾아온 것을 알리라. 삐걱. 그리고는,


“크로우?”


순한 얼굴에 활짝 그려지는 상냥한 미소. 그 미소를 향해 크로우는 덩달아 어색하게나마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라이가 씨.”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선택한 길로.